[벗는연극]현장의 심리학

입력 : 2010.04.18 16:52   |   수정 : 2010.04.18 16:56
‘공연 음란죄’라는 것이 있다. 공연(公演)이 아니라 공연(公然)이다. 공공연히 음란행위를 하면 벌을 받는다. 도도한 ‘표현의 자유’ 목소리 때문에 음란성 판정이 쉽지는 않다. ‘교수와 여제자’가 그렇다.

형법망이 성글다는 듯 미끄덩 빠져나오며 160석을 꽉 채우고 있다. 색을 입힌 홍등 같은 것이 없는 내추럴 조명일뿐더러 야릇한 신음, 성 도구 따위도 배제했으므로 걸려들 구멍이 없다고 연출자는 강변한다.

1993~97년 당시 무려 36만 명이 봤다는 외설극 ‘마지막 시도’ 덕 혹은 탓에 터득한 노하우를 적용했단다. 오픈 런, 무기한 롱런이 가능하던 ‘마지막 시도’가 당국의 개입으로 무산됐다며 땅을 친다. 그는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교수와 여제자’의 형식은 틀림없는 연극이다. 그런데 관객층은 여느 연극과 사뭇 다르다. “연극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보는데, 그게 바로 이거”라는 남녀가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3만 원짜리 입장권은 곧 묽은 의미의 면죄부다. 성인업소의 ‘홀딱쇼’가 아니라 소극장의 엄연한 ‘무대예술’ 감상이라는 포장지를 방패 삼았다.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가는 노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 코앞에서 꿈틀댄다.

객석의 30~70대 남자들은 눈에서 빛을 뿜는다. 매우 젊은 여배우의 나신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요소요소에 시선을 꽂는다. 영상물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 대놓고 엿보기 현장이다. 개중에는 수행원 10여 명을 태운 차량들을 포함, 5대를 동원해 행차한 모름지기 거물급 장년부부도 섞여있다. 공연 직전 맨 뒷자리에 앉는다. 막이 내리자마자 얼굴을 들키지 않은 채 바로 나갈 수 있는 좌석이다. 20대 후반 여자를 대동한 할아버지도 있다.

부부가 함께 오면 반값에 구경시켜준다고 했더니 여자 예매 손님이 몰린다. 확인하면 30% 이상은 부부사이가 아니다. 주민등록증이나 건강보험증의 주소가 다르다. 예외 없이 남자가 부랴부랴 제값을 치르는 경우들이다. 혼자 오는 남자가 아주 많다는 사실은 특기사항이다.

교수도, 여제자도 극을 내세우지 않는다. 뜬금없이 성 치료사를 자처한다. 청년도 언젠가는 이고 진 저 늙은이처럼 성기능 부전이라는 짐을 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고개 숙인’ 교수를 여제자는 아기처럼 보듬는다. 젖을 물리고, “쉬~ 했어?”라며 기저귀도 갈아준다. 자궁회귀본능 자극 장치다.

극장의 의자를 차지한 절대다수 중장년 남자는 제 또래가 딸뻘 처녀를 상대로 벌이는 온갖 짓거리들에서 대리만족을 구한다. 관음증의 나무가 물을 잔뜩 빨아들이면 그만이다. 연극이라는 숲은 무의미하다.
연기자들이 노출증을 즐기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을 구석구석 살피는 심리가 관음(觀淫), 도시(盜視)라는 데는 딱히 토를 달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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