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스·카라얀이 거쳐간 곳에서 쇼팽을 녹음하다

입력 : 2016.11.17 03:00

[첫 스튜디오 정규앨범 낸 조성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 등 담아
"발라드 네 곡 사흘간 녹음, 마지막 날 다시 친 연주가 실려
내년 카네기홀 데뷔… 꿈 이뤄… 새 목표는 빈필·베를린필 협연"

"제 인생에서 변호사를 만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콩쿠르 직후 음반사에서 계약서를 받았는데 A4 용지로 서른 장이나 되더라고요. 변호사한테 도와달라 했지만 매니지먼트사(社)를 결정하는 문제도 어려웠어요. 그때 일본에서 만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말했어요, '너의 직관을 믿어라'라고."

스물둘 청년을 향한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는 3분간 멈출 줄을 몰랐다. 피아니스트 조성진(22). 지난해 10월 세계 최고 권위의 피아노 경연대회인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그가 새 앨범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발라드'(도이체 그라모폰·25일 발매)를 들고 돌아왔다. 미국 순회공연을 마친 지 여드레 만이었다.

16일 오전 서울 JCC 아트센터에서 열린 간담회. 그는 "콩쿠르 끝난 지 1년 됐는데 지금까지 가장 빨리 지나간 한 해였던 것 같다"고 했다. 조성진은 "콩쿠르 결선에서 참가자 열 명 중 첫 번째로 연주를 마쳤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지메르만한테서 메일이 와 있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인데도 '연주가 좋다. 축하한다'고 칭찬해줬다. 참 좋은 기억"이라고 했다. 지메르만은 197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세계적 피아니스트다.

‘내 아들도 저렇게 컸으면….’ 지난해 쇼팽 콩쿠르 이후 자녀를 ‘제2의 조성진’으로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가 많아졌다. 조성진은 “부모님은 나를 압박한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를 끝까지 할 줄 몰랐다고 하셨고, 아빠는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 음악은 부모가 억지로 시키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내 아들도 저렇게 컸으면….’ 지난해 쇼팽 콩쿠르 이후 자녀를 ‘제2의 조성진’으로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가 많아졌다. 조성진은 “부모님은 나를 압박한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를 끝까지 할 줄 몰랐다고 하셨고, 아빠는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 음악은 부모가 억지로 시키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콩쿠르 본선 실황 연주를 담은 음반이 1년 전 음반 판매 순위 1위를 휩쓸었다.

"지난 6월 영국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 석 달 뒤 독일 함부르크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할레에서 '네 개의 발라드'를 녹음했다. (이탈리아 지휘자) 지아난드레아 노세다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는데 편하게 받쳐줘서 노래하듯 칠 수 있었다. 혼자하는 녹음이 더 힘들었다. 애비로드는 비틀스와 카라얀이 녹음한 공간이어서 그들 사진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신기했고, 함부르크는 내가 좋아하는 라두 루푸의 슈베르트 즉흥곡이 녹음된 장소여서 뜻깊었다."

―녹음 과정은 어땠나.

"발라드 네 곡을 사흘간 녹음했다. 첫째 날 3·4번, 둘째 날 1·2번을 하고, 마지막 날 정리 차원에서 전부 다시 쳤는데 앨범에는 그 마지막 연주가 들어갔다. 느낀 게 많았다. '이제 다 됐다' 생각하고 긴장 안 하고 쳤더니 연주가 더 잘된 거다."

―쇼팽이 질리지 않나.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콩쿠르 끝나고 연주회에서만 오십 번 넘게 쳤다. 늘 처음 하는 듯 신선한 느낌을 살리려 애 많이 썼는데 이제야 이 곡이 편하게 느껴진다. 같은 걸 반복하니 지루하지 않냐고 묻는데 내게 쇼팽은 좋은 기회를 준 작곡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거나 연주가 느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쇼팽 아닌 다른 작곡가들과의 여정은.

"내년부턴 베토벤이나 라흐마니노프를 자주 들려 드릴 계획이다. 특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은 2018년까지 잡혀 있다. 내년 독주회 땐 제일 먼저 모차르트 소나타와 드뷔시 '영상'을 들려 드릴 것 같다."

지난 6월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지아난드레아 노세다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하고 있는 조성진. /유니버설뮤직
지난 6월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지아난드레아 노세다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하고 있는 조성진. /유니버설뮤직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조성진은 유럽과 미국, 아시아를 넘나들며 80여 차례 무대에 섰다. 음악에만 바친 삶이 지루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남들은 대학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부럽지 않으냐고. 내 나이 아직 스물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다."

―내년 2월 22일 뉴욕 카네기홀 데뷔를 앞두고 있다.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 하는 게 꿈이었다. 작년 이맘때 대극장 연주 제의가 들어와 깜짝 놀랐다. 또 욕심이 생긴다. 베를린필이나 빈필과 협연하는 것. 당장은 어렵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새로운 목표고 꿈이다."

조성진이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은신처에 있다 발각된 주인공 스필만이 독일 장교 앞에서 연주한 곡이다. 평온과 격정이 교차하다 비극적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대목에서 특유의 깔끔한 손놀림으로 애달픈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이어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는 녹턴 20번도 들려줬다. 조성진은 내년 1월 3~4일 롯데콘서트홀과 5월 초 통영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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