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名畵인가] 힘찬 붓질로 그린 절망 속 열정

입력 : 2014.04.07 23:24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 [23] 박고석 '범일동 풍경'

6·25전쟁 당시 부산은 역설의 낙원이었다. 피란길을 재촉해 어렵사리 밟은 부산은 삶과 희망의 땅이자 굶주림과 절망의 땅인 동시에 순수와 열정의 땅이기도 했다. 전쟁 통에 모두 부산으로 몰리면서 인구는 전쟁 전의 2배인 84만명으로 늘었다. 판잣집이 철로변 공터를 따라 늘어서고 이내 황령산을 향하며 문현동 공동묘지에 이르렀다.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은 이때의 작품이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지만 야수파다운 역동적인 화필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단순한 구도에 대담한 터치, 굵고 힘찬 검은 필촉의 인물 외곽 검은 선은 격정적이면서 절제되어 거칠지만 정확하다. 어스름 동이 터올 즈음 아이 업은 아낙들이 무리지어 철길을 건너고 있다. 아마도 무작정 일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리라.

박고석의 1951년작‘범일동 풍경’, 캔버스에 유화, 55x67.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고석의 1951년작‘범일동 풍경’, 캔버스에 유화, 55x67.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1 때인가, 나는 창경궁 모퉁이에 있던 박고석의 화실로 현판만 보고 올라갔다. "선생께 입시 데생을 배우고 싶다"고 당돌하게 말하자 선생은 나를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라고 반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오늘은 선생에게서 그날 이후 들은 이야기를 적어본다.

평양 출신의 박고석은 광복 후 신문기자로 서울에 정착했다. 6·25가 터지자 경기도 마석과 충청도 일대를 떠돌며 장사를 했다. 서울 수복과 함께 돌아왔다가 1·4 후퇴 때 다시 부산 범일동으로 피란을 갔다. 선생의 부인은 건축가 김수근의 누나, 김순자였다. 패션디자이너로 고대 의상 연구소에 일가를 이룬 김순자는 알아주는 손맛을 지닌 것으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살아볼 요량으로 개천 위에 기둥을 세워 식당을 열고 카레라이스를 팔았다. 박고석은 부산공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이 시절 한묵, 손응성, 이중섭, 김환기는 고석의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철없는 이들은 고석의 아내가 다음 날 장사할 밑천까지 털어 술을 마셔 살림은 항상 빠듯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갑자기 선생 자리를 접은 고석은 시장에서 헌옷, 중고 시계 행상 등을 해보지만 딸린 식솔들 때문에 늘 궁핍했다. 고생은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김병기는 역전에서 토스트를, 이중섭은 미군부대에 나가 배에 기름칠을, 홍종명은 찐빵을, 정규는 깡통으로 쓰레기통을 만들어 팔았다. 이런 중에도 박고석은 지금의 범일동 동천 위에 나무로 얼기설기 꽤 운치 있는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림에 매진했다. 박고석에 의하면 비록 가난했지만 모두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열정을 또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작품 보려면… ▲7월 6일까지, 휴관일 없음 ▲부산시립미술관 ▲관람료 성인 6000원, 초·중·고생 3000원, www.koreanpainting.kr (051)74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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