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 안팎에서 빚어낸 풍경…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움직인다

  • 김현 기자

입력 : 2025.04.28 15:15

이용덕 개인전 ‘PORTRAIT OF SEEING : 비워진 모습’
신작 비롯한 20여 점
5월 7일부터 6월 7일까지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

작업실에서 촬영한 이용덕 작가의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작업실에서 촬영한 이용덕 작가의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용덕의 조각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입체적으로 작품을 만들어 외부 세계에 드러내는 대부분의 입체 작품들과는 달리 이용덕의 작품은 직육면체의 틀 안으로 파고 들어가 음각으로 존재를 비워낸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의 눈에는 마치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입체적인 양각의 형상으로 보인다. 또한 그렇게 드러난 인물 형상은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상호작용한다. ‘있지만 없는’ 이러한 환상적 체험은 동양철학에서의 음양의 조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용덕의 작품에는 항상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작가가 일상 속에서 ‘보는’ 행위를 통해 포착한 그때의 인물, 시간, 공간, 분위기와 같은 복합적인 요소를 작품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그려낸다. 이용덕은 보통의 조각 작가들과 다르게 채색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언뜻 회색으로만 보이는 이 색감은 사실 옐로우, 레드, 블루의 얇은 레이어가 겹쳐진 것으로, 강한 대비보다는 비슷한 계열의 색들이 여백에 채워지며 작품에 깊은 울림을 더하고 관람객에게 시각적 사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업에 몰두한 이용덕 작가의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작업실 전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역상조각’으로 40여 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온 이용덕 개인전 ‘비워진 모습 PORTRAIT OF SEEING’이 5월 7일부터 6월 7일까지 서울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조각의 본질과 감각의 구조를 탐구해 온 작가의 근작 2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작업실에서 작가 이용덕을 만났다. 작년 서울대학교에서의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한 뒤, 100퍼센트 자신의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이용덕은 “이제 진짜 나에게 돌아온 것 같다.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을 것”이라고 했다. 열정이 담긴 눈빛은 올곧게 반짝였다. 교직생활은 끝났다. 이용덕의 작품 활동은 이제 다시 시작된다.
 
작품 앞에 앉은 이용덕 작가의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작품 활동을 이어온 지 어느덧 40여 년이 흐르며 이제 ‘역상조각’ 하면 가장 먼저 선생님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밖으로 돌출된 형상이 아닌 안으로 움푹 들어간 인물을 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빈자리를 바라보게 되는 인간 존재의 역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역상조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 같네요. 제가 어린 시절, 저희 아버지는 카메라를 아주 잘 다루셨습니다. 아버지는 손바닥만한 필름을 들여다보면서 아주 가늘게 깎은 연필로 사물의 윤곽을 덧칠해 명암을 수정했습니다. 또 잡티 같은 걸 지우기도 했고요. 필름은 다들 알다시피 흑백이 반전돼 있죠. 그래서 무턱대고 보면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기도 한데, 아버지는 그 작업을 하면서 ‘지금 어둡게 칠한 건, 나중에 하얗게 변할 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한마디로 음양의 조화, 양각과 음각의 차이를 그런 과거에서부터 배운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뒤로 선생님은 베를린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추상 조각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사실적인 인물 형상을 고집하셨어요. 베를린에서는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셨나요?
 
제가 당시 주변인들에게 베를린으로 간다고 말했을 때, 다들 프랑스 같은 곳으로 가서 표현을 세밀하게 배우지, 왜 형식과 모던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베를린이냐고 제게 많이 물었어요. 근데 저는 인체와 인물을 더 잘 표현한다는 게 제 숙제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왜 인물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갔던 것 같아요.
 
실제로 베를린에서도 ‘왜 이걸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독일어로 예술을 ‘쿤스트(Kunst)’라고 하는데 인공적, 또는 인조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한 마디로 자연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예술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의지가 자연과 대비되게 했느냐는 거죠. 그때의 경험은 제 작업에서의 기원을 찾는데 도움이 됐어요.
 
그렇다면 역상조각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신 건 무엇인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사람을 관찰하고 표현해 오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그냥 좋았어요. 그러나 그 과정에서 관점이 저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느냐, 어떤 분위기냐, 어떤 느낌이냐, 이런 걸 포착하는 식으로 변화한 것 같아요. 보통 단일상만 만드는 경우에는 배경이 없잖아요. 입체 조각 작품 딱 하나 있는 거니까. 근데 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외곽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 사람이 가진 시간이나 분위기 같은 게 분명히 있어요.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상조각의 방식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음양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다 보니까, 이렇게 사람을 음의 요소로 만들어놨을 때 안팎을 오가면서 인간의 본질을 더욱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playing 054783, 2024, mixed media, 170x119x12cm. /작가 제공
writting 041583, 2004, mixed media, 127x90x12cm. /작가 제공
 
과거에 선보였던 작품 ‘동시성’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촬영한 세계 네 곳의 실제 인물의 모습을 역상조각에 담았다고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형상을 묘사하기만 하는 게 아닌,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 같은 날, 같은 시각 제각기 다른 사람 네 명을 대상으로 했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우리는 시간을 숫자로만 생각하죠. 그런데 그것은 시계에 종속된 사고입니다. 사실 절대적인 시간은 그렇지가 않죠. 또 위치에 따른 시차도 있고요. 그러니까, 서로 다른 공간이라면,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을 갖고 있는 건데, 이걸 절대적으로 같은 시간으로 재현한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이 생겨난 거죠. 그래서 이제 시간을 하나 정해서, 세계 곳곳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며칠 몇시에 사진을 찍어달라, 그걸 기반으로 배치해서 작업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시간대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서사성이 다르죠. 그걸 한 가지로 모으는 작업이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장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 다른 시간대가 같은 장소에 모일 수도 있겠고요. 한 마디로 절대적으로 같은 공간에 다른 시간이 존재할 수도 있고,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이 존재할 수도 있겠죠. 그 두 가지 동시성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walking 060584, 2024, mixed media, 105x170x15cm. /작가 제공
sitting 041283, 2024, mixed media, 140x110x12cm. /작가 제공
 
선생님께서는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계십니다. 이번 전시 역시 인간 존재와 깊이 있는 사유를 담아낸 작품 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출품작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과거에는 제가 공간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벽과 바닥 등등 명확한 형태였죠.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가끔씩 바다를 보러 가면 구름도 지나가고, 파도가 치고 그런 풍경이 보이죠. 근데 그건 다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인 건 땅, 물, 하늘 이런 요소죠. 가장 본질적인 공간을 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포착한 인물이 가장 기본적인 배경 아래 계속 지속되고 있는 장면을 표현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수직과 수평의 선 구조로 바다의 지평선과 인간의 직립성을 나타냈습니다. 이렇듯, 정말 최소한의 배경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조형적 표현을 시도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최근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고요.
 
작업실 전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용덕 작가가 재료를 사용해 작업하는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작업실 전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선생님께서는 기본 요소나 분위기를 배경으로 표현했다고요. 그래서인지 배경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 또는 구획을 나누는 선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이런 것도 표현에 기여하는 요소일까요?
 
기본적으로는 수직, 수평의 요소를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바다의 수평선은 가로,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세로. 이런 식으로 최소화한 조형을 나타낸 거죠. 거기에 사선을 조금 더해서 고요하면서도 잔잔한 원론적인 느낌에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번 출품작의 배경 색이 하늘색, 소라색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의도하신 걸까요? 또, 보통 조각 작품은 채색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선생님의 작품은 묘하고 감각적인 색으로 채색돼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는 합니다.
 
네, 기본적으로는 회색이 바탕이 됩니다. 회색에는 기본적으로 색의 저편의 색이 우러나옵니다. 본래 색과 관람객의 눈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작은 요소가 개입되며 우러나오는 겁니다. 제 색은 기본적으로 인물이 갖고 있는 정황이나 심리적인 느낌을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조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 색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가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공간과 시간, 분위기나 소리까지 느껴지게끔 해야 해서요. 결코 대충 할 수가 없습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