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파멸과 환멸의 180분… 마침내 인생의 진실을 보다

입력 : 2010.05.09 23:07

연극 '바냐아저씨'

러시아 말리 극장에서 온 '바냐 아저씨'는 아름다운 무질서의 연극이다. 등장인물들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바냐의 우울증, 소냐의 불안, 아스트로프의 무기력, 엘레나의 권태, 세레브랴코프의 불면(不眠)은 그 일탈의 증거다. 안톤 체호프가 쓰고 레프 도진이 연출한 이 드라마는 천둥과 번개, 폭풍우로 무대를 때리지만 자연의 힘으로도 헹궈낼 수 없는 게 인간의 감정이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혼돈은 은퇴한 교수 세레브랴코프와 젊은 후처 엘레나, 의사 아스트로프가 마을로 오면서 시작된다. 열심히 일하며 세레브랴코프의 영지(領地)를 지켜온 바냐는 엘레나에게, 바냐의 조카 소냐는 아스트로프에게 각각 마음이 휩쓸린다. 과거를 잊고 남은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충동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은 겹친다. 엘레나와 아스트로프가 서로에게 연정을 느낀 것이다.

말리 극장의 연극‘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오른쪽)와 엘레나. /LG아트센터 제공
말리 극장의 연극‘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오른쪽)와 엘레나. /LG아트센터 제공
말리 극장 배우들은 저마다 '배역을 살듯이' 연기했다. 감정의 크기가 충분히 커, 종종 큰 몸짓을 할 때도 진정성이 전해졌다.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레프 도진은 흔들의자·어둠·촛불·비·실패·건초더미 등으로 불안과 후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환멸감이 무대를 지배했고 관객을 감염시켰다. 인물들이 각자의 인생 같은 의자를 들고나오는 대목, 흘려보낸 시간에 분풀이하듯 실패에 실을 감는 장면 등이 좋았다. 이 파멸의 드라마에서 "폭풍우가 지나가도 난 싱싱해지지 못하는군"이라고 푸념하며 총까지 쏘는 바냐와, "(아스트로프의 진심을) 모르는 게 낫겠어요. 적어도 희망은 있으니"라는 소냐의 태도에는 시소 놀이 같은 균형감이 있었다. 도진은 엔딩에서 삶의 불행을 포착하는 강력한 그림을 빚어냈다. 주문(呪文)처럼 되풀이되는 소냐의 대사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세 덩어리 거대한 건초더미의 하강, 그리고 객석을 돌아보는 바냐의 처연한 눈빛을 포갠 것이다. 커튼콜은 4번이나 이어졌다. 180분짜리 연극에서 인생의 진실을 봤다고 생각한 관객일수록 박수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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