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 잉태한 '이의 남자들'의 남자들 인터뷰

입력 : 2010.03.11 11:22

"영화와 다른 깊이에 빠져보세요

10년 전 연산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었다. 공길은 기름 바른 듯 윤기 나는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빗어 넘겼다. 머리엔 둥근 화관을 썼다. 장생은 머리카락 길이가 2~3㎝ 정도로 짧았다. 10년 변천사 속에 캐릭터의 외모도 변했다. 상복을 입은 연산은 봉두난발이다. 공길도 머리를 늘어트려 목과 어깨를 덮는다. 꽃장식도 없다. 의상은 좀 더 조선의 복식을 갖췄다. 장생 역시 운동선수 같던 모습에서 장발로 부드러워졌다.

연극 '이(爾)가 올해 10주년 기념 무대를 올렸다. 영화 '왕의 남자'(2005)를 낳은 바로 그 작품이다. 초연 당시 주연 멤버들이 다시 뭉쳤다. 공길 역의 오만석에 장생은 이승훈, 연산은 김내하(김뢰하)가 맡았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각각 이준기 감우성 정진영이 열연했던 역할이다.

26일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10주년 공연을 시작한 '이'의 남자 세 명을 만났다.

연극 '이(爾)'가 초연 당시 멤버들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1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왼쪽부터 연산 역의 김뢰하, 장생 역의 이승훈, 공길 역의 오만석.
연극 '이(爾)'가 초연 당시 멤버들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1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왼쪽부터 연산 역의 김뢰하, 장생 역의 이승훈, 공길 역의 오만석.

▶영화와 다른 '이'만의 매력

2005년 개봉된 '왕의 남자'는 1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흥행사를 새로 썼다.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연극에서 또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의 고유함이라고 할까. 영화가 갖는 평면의 아쉬움에 비해 연극은 생생한 입체감이 있다. 영화가 대중적이라면 연극은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배우들의 대사에서도 언어의 깊이와 감동이 다를 것이다."

초연 멤버 중 10년 동안 '이' 공연을 한번도 빠지지 않은 건 장생 역 이승훈 뿐이다. "공연 중 목소리가 안 나온 적도 있고, 덤블링 연습 중 허리를 다친 적도 있다. 치열하게 연습했다. 초연 당시 뭉쳐진 끈끈한 정이 10년을 왔다. 새로운 가족을 얻은 기분이다."

▶현실과 운명의 줄타기

10년을 지나며 달라진 건 외모만이 아니다. 김태웅 연출은 "초연 때는 공길에게 마음이 갔고 중반엔 연산에 무게를 뒀다. 지금은 광대들에게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백성들에게 광대의 소학지희(말장난, 성대모사, 재담, 음담패설 등으로 시정을 풍자하던 조선시대 유희극)는 신명나는 놀이다. 왕과 조정대신들 앞에 선 공길 패거리에게 광대짓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현실과의 타협에 빠진다.

배우 오만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실제 배우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결국 광대다. 배우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가급적이면 건강한 웃음이 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눈물을 줄 수 있는 광대로 남고 싶다. 하지만 때로는 타협을 해야 하고 본의 아닌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극중에서 공길과 장생이 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겐 안식년이 필요해

오만석 김내하 이승훈 등 '이'의 중심 배우들은 10주년 공연을 앞두고 "앞으로 더이상 '이'에 출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팬들로선 아쉬운 대목이다.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1년만이라도. 배우들이 지쳤다기 보다 작품 자체가 지친 느낌이다. 하나의 작품이 10년을 달려왔으니 안식년이 필요하다. 초연 멤버로서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 마무리를 해준다는 의미다.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오만석)"

"20주년이 오면 다시 모일지 모르지. 여기 모여 있는 '이'의 태동을 함께 한 사람들을 이를테면 1기 선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1기가 10년을 마무리 하고, 그 다음엔 2기 선수들이 바통을 이어받아야지. 솔직히 우리 나이들도 배역에 비해 10년씩은 늙어 있으니까.(김내하)"

"난 올해가 진짜 마지막이다. 이제 '이'는 않한다. 물론 '이'는 계속 돼야지. '햄릿'처럼 시공을 초월한 명작으로 남길 바란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를 객석에서 본 적이 없다. 이제 나도 한명의 관객으로 '이'를 만나보고 싶다. 다른 사람이 장생하는 걸 보고 싶다.(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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