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을 미술작가, 잊을 수 없는 건물
'잊히지 않을 작가'를 추천한 전문가들 (모두 20명·가나다순)
강수미 미술평론가, 고충환 미술평론가, 김복기 월간 '아트인컬쳐' 편집장, 김상철 월간 '미술세계' 편집주간,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김영호 중앙대 미대 교수,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태호 서울여대 미대 교수, 김홍희 경기도미술관장, 박영택 미술평론가, 오광수 미술평론가, 윤우학 미술평론가, 윤진섭 호남대 미대 교수, 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이주헌 미술평론가, 이준 삼성미술관 리움 부관장, 전영백 홍익대 미대 교수,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최열 미술평론가
"점 하나 덩그러니 찍어 놓고… 참 어이없다."
이우환 작품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던질 법한 이런 질문에 어떤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이우환 예술은 전문가들조차도 쉽게 오를 수 없는 '큰 산'이다. 그 예술 세계의 '게놈'(genome)이 아주 복잡하다. 답이 잘 보이지 않는 미술작품. 역설이지만 이것이 이우환 예술의 매력이다. 그는 현재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 작가들 중 우뚝 서 있는 데다가, 동양 모더니즘 회화의 전개에 끼친 미술사적 업적은 두고두고 높이 평가될 것이다. 이우환을 '잊히지 않을 작가'로 꼽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우환은 동양과 서양을 떠돌며 살고 있는 세계인이다. 예술의 지향점과 그 성가(聲價) 또한 국제적이다. 이우환은 '우리'보다 '나'에 착목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물학적 배경인 한국이나 동양의 공동체 언어를 내세우길 싫어한다. 국제성을 위해 지역성을 팔지 않는다. 이우환은 말한다. "나와 타자가 시적으로 악수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이고 예술의 지표다."
예술가란 문명의 한 토막을 생산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특히 현대미술 작품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빠지면 미술은 공허한 '유희'로 흐르기 쉽다. 이우환은 현대미술의 싸움터에서 명징한 자기 논리의 성(城)을 쌓아가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탁월한 예술이론가이자 비평가다. 이우환이 그린 점과 선 하나하나는 깊은 통찰과 사유의 흔적이다. 점과 선에는 문·예·철(文·藝·哲)의 에너지가 세포처럼 작동하고 있다.
살아 있는 미술사(史) 이우환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일본 미술계를 석권한 '모노하(物派)'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모노하'란, 이우환이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설치작품을 했듯,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 물질이나 물체를 그 자체로 사용해 예술언어로 삼았던 작가들을 가리킨다. 이우환은 또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단색화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전통에 안주하지 않았고, 철학을 전공했지만 서양의 동시대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다. 동서양의 미적 기준의 한계를 모두 피해가면서 양자가 서로 만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그의 작품에는 동아시아 회화의 본질을 재발견해낸 조형 방법과 정신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서구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예리한 비판력이 살아있다. 그래서 이른바 '이우환주의'는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현… 물질의 본성을 끌어내는 조각가
사물에는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 본성은 사물들 속에 숨겨져 있다. 본질은 기능적인 관점이나 자연과학적인 분석대상으로 삼아 뜯어보려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처럼 사물의 물질적인 성질 너머에 있으며, 그 무엇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위상으로서 자리하며, 모든 선입견을 걷어낸 맨 의식에만 자기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에 도로포장용 재료인 아스콘이나 침목을 소재로 한 조각은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사람들을 위해 길이 되어준 재료들이다. 작가는 이제 그 소임을 다해 버려진 이 재료들 속에서 마치 길바닥처럼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인 보통사람들의 심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초상을 캐내어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 정현은 전통적인 형상조각과 모더니즘의 물성조각 사이의 단절된 끈을 이어준다.
이번 명단에서 빠진 중견·원로 작가 많아 앞으로 조사 정례화
유명한 미술사학자 E.H. 곰브리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글을 쓸 당시에 각광을 받아 기록된 작가들이 진정으로 '역사화'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으며, 대체로 비평가들은 형편없는 예언자임이 증명되곤 했다"라고 썼습니다. 이번 설문에 참여했던 응답자 K씨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 우리가 추천하는 작가들이 정말로 50년 뒤, 100년 뒤에도 기억될지, 아니면 잊혀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전제했습니다. 곰브리치가 저서에서 "이 책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유명한 작품과 작가의 수는 엄청나다"고 한 것처럼, 이 설문 결과에서도 누락된 중견작가·원로작가들의 이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미술사적 평가는 별도의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만 이번 설문조사의 참여자들은 '비영리 부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전문가들'이 우리 미술작가들의 미래 가치를 가늠해보아야 하고, 그것은 시장의 뉴스가 비대한 요즘 같은 때에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에 동의하였습니다.
미술전문가들이 어떤 작가를 미래의 작가로 생각하는지는 해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지는 이 같은 작업을 정례화해서 우리 작가들의 미래 가치에 대한 조사결과와 그 변화를 통계적 자료로 축적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