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6.03.26 11:24
| 수정 : 2026.03.27 09:38
2026 ACF, AVENUEL ART FAIR
한국적 추상미술의 토양, 유영국·박서보·윤형근
4월 22일부터 잠실 롯데百 에비뉴엘
국내외 블루칩 작가 등 28인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한동안 침체돼 있던 국내 미술 경기가 점차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다. 지난해 미술품 경매 낙찰 총액은 1405억원으로 최근 3년 중 최고액을 기록하며 반등세를 보이고 있고, 데이미언 허스트(Damian Hirst), 조나스 우드(Jonas Wood) 등 메가스타 작가들의 전시가 연이어 한국을 찾는다. 국내 아트마켓에서는 여전히 블루칩 미술가에 대한 견고한 관심이 지속되며,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청년 작가를 향한 주목이 공존하는 가운데,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과 지형도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조선일보와 롯데백화점이 공동 주최하는 프리미엄 전시형 아트페어 ‘2026 ACF, AVENUEL ART FAIR’가 4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에서 개최된다. 유영국,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백남준, 최병소, 최명영, 이강소 등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얼굴들을 비롯해,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나라 요시토모(Yoshitomo Nara),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등 국제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큰손 작가들의 작품이 내걸린다. 이에 ‘ART CHOSUN’은 전시 개막을 앞두고, 국내외 현대미술의 생성과 전개 그리고 미래를 대표하는 참여 작가 28인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기획 시리즈를 8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첫 회는 유영국, 박서보, 윤형근 이들 3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자연의 정수(精髓), 곧 유영국의 정수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의 토양을 다지고 평생 화두였던 자연을 소재로 예술 세계를 심화한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작가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점, 선, 면, 색과 같은 기본 조형 요소로 형상화하는 데 일생을 몰두했다. 그는 자연을 향한 절절한 애정을 적색, 황색, 녹색, 청색 등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컬러로 표현해 냈다. 빨강, 노랑 등 원색 대비와 함께 굵은 선이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담백한 색면(色面)으로써 분할 구성되는데, 흡사 발광하듯 박력 있는 색이 리듬감과 율동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경북 울진에서 나고 자란 유영국은 지근거리에 바다를 두고 하루가 멀다고 배를 타고 나갔다 전해진다. 해안이나 선상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이 그에게 큰 영감이 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는 그의 회화가 기하학적 조형을 토대로 해 단순하면서 엄격한 화면 구성이 도드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태양이 지고 뜰 때 붉게 물든 노을이 바닷물에 번진 모습을 동그라미와 네모로, 지평선 위 비죽비죽 솟은 산은 세모로써 비구상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가장 기본적인 조형 언어를 주체로 삼아 자연의 생명력과 본질을 대변하고자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산은 유영국의 예술 세계를 이루는 중추적인 모티프인데, 작가는 이를 최소한으로 정제하고 또 절제해 삼각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회화 세계를 엄정하고 중첩된 기하학적 질서로 완성한다. 작가에게 산은 그저 풍경 재현이 아닌, 순수 조형 요소를 빌려 구축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비전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연 요소를 비구상적으로 단순화하고 응축시킨 조형들은 서로 대비되며 긴장감을 주기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모니를 동시에 빚어낸다. 기하학적인 질서라고 하면 다소 경직되고 조심스러울 것 같지만, 그의 화면(畫面)을 마주하면 실제 자연 풍광을 바라보는 듯 어색함 없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느껴지는데, 자연의 그것을 그의 회화에서 역으로 재발견하는 순간이다. 구성적인 도형 속에서 자연의 원형을 발견하고 그 본질을 찾고자 했던 작가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오는 5월 1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예정된 유영국 탄생 110주년 기념 회고전‘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앞두고,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는 귀한 기회로 아트러버들의 이목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한 풍광이 아님에도 추상적으로 단순화된 유영국의 조형을 두고 왜 자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단색화 열풍 주역… 묘법(妙法)’ 같은 박서보의 ‘묘법(描法)’
박서보(1931~2023). 이렇다 저렇다 할 수식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저 이름 그 자체로 예술 세계가 온전히 설명되는 미술가가 그 외에 또 있을까. 박서보는 대표 연작 묘법(描法·Écriture)’을 통해 서양의 추상미술과 구별되는 한국적 추상미술 고유의 특성과 맛을 국제 미술계에 소개한, 이른바 단색화 열풍의 주역이자, 한국 미술이 해외 아트씬의 중심에 안착할 수 있도록 기여한 선도자다.
그는 단색화의 기본 정신으로 무목적성과 반복성을 강조하곤 했다. 스님이 쉼 없이 목탁을 두드리며 선에 도달하듯이, 화면에 끊임없는 반복성을 드러내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과정을 회화에 담아내던 그였다. 단순히 단일색을 띤다고 해 단색화가 아닌, ‘수행’을 거듭하다 보면, 화면 여기저기 밀리며 물성이 만들어지고 무목적성과 반복성, 이 두 가지 요소와 어우러지며 정신성을 이룬 그 자체가 바로 단색화라고 역설한 것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고랑은 애초부터 만들어지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선을 긋거나 종이를 밀어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자연스레 형성된 골짜기는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 결국 그 모든 행위는 작가 자신을 비워내고자 함이었다.
그의 최고 인기작 ‘컬러(후기) 묘법’은 자연에서 기인했다. 손의 흔적을 강조하는 대신 일정한 간격의 고랑으로 형태를 만들고 풍성한 색감을 부각해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작가의 대표적인 연작으로 꼽힌다. 이 시리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매혹적이고도 아늑한 색을 지닌 것이 특징인데, 그야말로 그의 ‘묘법’이 말 그대로 ‘묘법(妙法)’인 셈이다. 불타오르는 단풍처럼, 때로는 수평선에 걸친 섬처럼 흡사 자연을 그대로 옮겨 화폭 위에 펼쳐 놓은 것 같은 오묘하며 우미한 화면은 보는 이를 침잠의 심연으로 이끄는 듯하다. 이는 그가 늘 강조해 온 ‘치유의 예술’ 개념과 그 궤를 같이하는데, 특정 메시지를 강요하는, 즉 토해내는 것이 아닌,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흡인지’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이 그러한 것과 같다. 작가의 대표작이 공기색, 벚꽃색, 홍시색 등 자연으로부터 영감받아 직접 명명한 빛깔을 지닌 배경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컬러 묘법을 믹소그라피아(Mixografia) 특수 기법으로 구현한 에디션 작업이 내걸린다. 일반 판화와 달리 작품의 질감과 요철을 고스란히 구현해 실제 원화의 그것과 같은 부조적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아 아트컬렉터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담대한 절제미, 윤형근의 ‘검은 기둥’
윤형근(1928~2007)의 화면에서는 진한 먹내가 배어 나온다. 표백 처리를 하지 않은 천이나 마포 위에 유화 물감을 있는 그대로 스미고 번지도록 함으로써 서양의 재료이지만 동양의 정서가 침윤한다. 담박하다 못해 절제된 조형미는 기품 있는 선비의 정신을 연상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올곧은 선비적 기질이 강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지는데, 자신의 그림 역시 추사 김정희의 서체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생전 회고한 바 있다.
윤형근(1928~2007)의 화면에서는 진한 먹내가 배어 나온다. 표백 처리를 하지 않은 천이나 마포 위에 유화 물감을 있는 그대로 스미고 번지도록 함으로써 서양의 재료이지만 동양의 정서가 침윤한다. 담박하다 못해 절제된 조형미는 기품 있는 선비의 정신을 연상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올곧은 선비적 기질이 강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지는데, 자신의 그림 역시 추사 김정희의 서체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생전 회고한 바 있다.
작가의 대표 연작이자, 번짐과 ‘문’을 연상하는 형상이 특징인 ‘천지문(天地門)’ 시리즈는 1973년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제작된 일련의 작업을 일컫는다. 작가는 마포 위에 큰 붓으로 냅다 내려그어 기둥 모양을 만드는데, 이러한 모양이 문을 떠올린다고 해 작가 스스로 ‘천지문’이라고 명명했다. 하늘을 상징하는 색인 청색(Blue)과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검정에 가까운 색을 만든 윤형근은 여기에 테레빈유 등을 섞어 농담을 조절해 먹과 같은 깊이감의 검은 기둥을 세우고 그사이 ‘문’을 터놓았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 그림의 명제(命題)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이러한) 구도(構圖)는 문(門)이다.”(1977년 1월)
윤형근의 검은 기둥은 시기에 따라 조형적 차이를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변곡점이 바로 1991년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만남이다. 이때 작가는 저드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단순화된 형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특유의 검은 칼럼이 더 엄정하고 단호해지며 또렷한 사각의 형태로 변모하게 되고, 색채 또한 더욱 명백해진 짙은 검은빛을 내뿜게 된다. 즉, 기둥의 형상이 한결 엄격하고도 간결해진 것인데,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갈수록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엷은 번짐 따위 또한 서서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 저드 특유의 미니멀리즘에 미학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이를 계기로 윤형근의 예술 세계는 단순함과 질박함을 합일하고 동시에 동서양을 넘나들게 된다. 후일 이 시기는 작가가 국제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게 된 때로도 평가받는다.
윤형근의 화업 일대에 걸쳐 시기별 작업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의미를 지니지만, 그중 1990년대 작업은 직접적이고 대담해진 화풍을 지닌다는 점에서 많은 미술애호가들이 선호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0년대 작품들이 출품돼 작가의 예술적 터닝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변화와 모색의 비교적 초기 단계인 1992년작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에서는 번짐이 어느 정도 배어 나오는 것이 보이나,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95-#76(Untitled)’(1995)와 같이 점점 시간이 갈수록 기둥에 확연히 힘이 실리는 변모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의 (02) 724-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