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12.17 17:32
이은실 개인전 '파고'
2026년 1월 31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6년 1월 31일까지 이은실 개인전 '파고'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이은실은 동양화 기법에 기반하여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의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문명사회에서 억압되거나 은폐된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욕구를 응시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심리적 갈등을 회화의 은유적 언어로 번안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첫 개인전이자 오래도록 숙고해 온 ‘출산’이라는 주제를 최초로 전면에 드러내는 자리이다. 개인이 삶 속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변곡점을 파도의 높이에 비유하는 전시명 아래 총 10점의 신작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1층과 지하1층에서 조명한다. 한편, 같은 기간 3층과 4층 전시장에서는 이은실이 2007년부터 2024년까지 제작한 과거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관습과 사회 규범에 투항하는 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 초기작부터, 점차 외부적 요인을 제거하고 내면의 정서적 파동에 주목하는 근작 화면까지 작품세계가 나아온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
1층 전시장에 선보이는 '에피듀럴 모먼트'는 폭 7.2미터에 이르는 대규모 회화 작품이다. 수묵 채색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화면은 두터운 안개로 뒤덮인 부감 시점의 산맥 위에 거대한 뱀 또는 용의 모습이 중첩된 장면을 선보인다. 네 개의 화폭을 휘감은 동물의 금빛 비늘이 신비롭게 빛나는 가운데, 곳곳에 해체된 뼈의 형상이 드러난다. 해당 회화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의 통증 완화를 위한 경막 외 마취제가 신체에 투입되는 순간의 환각 경험을 소재 삼는다. 극심한 진통의 과정 가운데 주입된 환상적 기억은 출산이라는 행위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신체적, 정서적 마취 상태를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이은실의 회화는 출산의 과정 속에서 겪은 폭발적인 응집과 분열의 힘을 경이로운 자연 현상에 비유하는 시각적 방법론을 취한다.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자연에 중첩하는 시도를 통하여, 주제는 여성적 서사에 머무르는 대신 인간 존재의 육체적, 정신적 외상과 그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확장된다. '멈추지 않는 협곡'은 신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분출하는 혈액을 거대한 협곡을 가로지르는 붉은 용암에 빗대어 묘사한다. '생사의 기로'는 그 용암이 대지 위로 혈관처럼 퍼져 나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살갗에 선명하게 불거진 핏줄의 위태로움을 연상시키는 화면은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모체의 격렬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푸른 안료를 수없이 중첩하여 깊은 바다의 빛깔을 구현한 회화 '전운'은 수면 위 커다란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 이내 찾아올 통증의 전조증상처럼, 풍랑의 도래를 예고하는 바다의 풍경이다.
또 다른 출품작은 출산의 순간에 분만의 주체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충격을 근접화면으로 보여준다. 출산에 의한 파열의 흔적은 일시적으로 발생하였다가 사라지거나, 또는 타인에게 드러내어 보이지 않는 부위에 은폐된다. 이은실은 그러한 상흔을 회화의 화면 위에 불러와 보다 가까이 대면한다. 일련의 화폭은 신체의 곳곳을 극도로 확대하여 구체적 형상으로 하여금 은유적인 추상이 되도록 한다. '고군분투'는 물리적 압력에 의하여 눈의 실핏줄이 터진 광경을 부분적으로 묘사하고, '절개'와 '흔적'은 각각 복부 절개 부위의 수술 자국과 튼살의 흔적들을 드러낸다. '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는 산후 유선염을 소재로 하여 모성에 따라주지 않는 신체의 한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