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와 미술(5) - 발: 퇴적된 중력

입력 : 2025.08.04 15:30
발의 해부학 / (www.daviddarling.info/encyclopedia/F/foot_anatomy.html)
발의 해부학 / (www.daviddarling.info/encyclopedia/F/foot_anatomy.html)
 
발은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산소와 영양분을 실은 동맥혈을 받기 곤궁하다. 궁색한 보급을 받은 후 남은 정맥혈을 다시 올려보내기도 험난하다. 그래서 발은 늘 붓고 아프다. 중력 때문이다. 손이 된 앞발을 그리고 직립 보행을 탓하지 않는다. 몸의 천대와 중력의 학대를 견디며 침묵을 밟는다. 발은 퇴적된 중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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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 보티첼리 (c.1484~1486) / (Wikipedia, Uffizi, Florence)
비너스의 탄생 - 보티첼리 (c.1484~1486) / (Wikipedia, Uffizi, Florence)
 
완벽한 신들에게도 발은 있다. 그런데 보티첼리의 발들은 아름답지 않다. 바다 위 조개를 디딘 미의 여신 비너스, 땅을 딛은 봄의 여신 호라, 하늘에 떠 있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꽃의 여신 클로리스. 미와 생명을 대표하는 신들의 발은 하얗게 부드럽고 풍만하지만 어딘가 못생겼다. 더 자세히 보면 신들의 발은 추형과 기형을 넘어 병리적이기까지 하다. 부드러운 풍만은 하지 부종 같고, 지나치게 하얀 피부에서 허혈과 냉증이 연상된다. 신은 불멸이며 신의 발도 성(聖)의 일부다. 하지만 발은 발이기 때문에 하대받는다. 
 
묵주 기도의 성모 - 카라바지오 (1607) / (Wikipedia,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묵주 기도의 성모 - 카라바지오 (1607) / (Wikipedia,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누구보다 속(俗)이었고, 누구보다 더러운 삶을 살았던 카라바지오의 발은 인간의 누추한 발바닥이다. 저 때 묻은 발이야말로 중력과 압제에 영원히 핍박받는 인간종에게 기대하는 발의 원형이다. 구원을 바라며 무릎 꿇은 자들의 더러운 발은 카라바지오 자신의 발일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발 - 멘첼 (1876) / (Wikipedia, Freunde der Nationalgalerie, Berlin)
예술가의 발 - 멘첼 (1876) / (Wikipedia, Freunde der Nationalgalerie, Berlin)
 
독일 사실주의의 거장 아돌프 폰 멘첼(Adolph von Menzel; 1815~1905)은 1876년에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얼굴이 아닌 오른발이다. 환갑의 중력을 견디지 못한 피부와 정맥이 사정없이 늘어지고 울퉁불퉁 저류한다. 비예술가의 젊은 발도 힘들 진데, 늙은 예술가의 발은 더 고되고 고통스럽다. 
 
이렇게 머리로부터 최남단이자 심장의 오지인 발은 못생기고, 더럽고, 고된 이미지를 신고 심란한 첫걸음을 뗀다. 그런데 여기에 ‘열등한 손’이라는 치욕까지 얹힌다. ‘발로 그린 그림’, ‘발로 쓴 글’, ‘발로 한 연주’. 이쯤 되면 그림, 영화, 음악 그리고 조경으로 문드러진 발을 씻어줘야 한다. 
 
(왼쪽)캉캉 무용수 - 크리스티 브라운 / (www.whytes.ie/art). (오른쪽)골고타 언덕으로 향하는 여정 - 크리스티 브라운 / (www.whytes.ie/art)
(왼쪽)캉캉 무용수 - 크리스티 브라운 / (www.whytes.ie/art). (오른쪽)골고타 언덕으로 향하는 여정 - 크리스티 브라운 / (www.whytes.ie/art)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향하는 예수의 무거운 발걸음과 캉캉 무용수가 허공을 향해 신나게 날리는 가벼운 발길질. 명작도 아니고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걸작도 아니다. 그런데 손이 아닌 발로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왼쪽)크리스티 브라운 (Christy Brown) / (www.irishcentral.com/culture/christy-brown-my-left-foot), (오른쪽)영화 ‘나의 왼발’ 포스터 (1989) / (Copyright 1989, Miramax Films)
(왼쪽)크리스티 브라운 (Christy Brown) / (www.irishcentral.com/culture/christy-brown-my-left-foot), (오른쪽)영화 ‘나의 왼발’ 포스터 (1989) / (Copyright 1989, Miramax Films)
 
크리스티 브라운(Christy Brown; 1932~1981)은 아일랜드의 화가이자 시인이다. 뇌성마비 때문에 사지 중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왼발뿐이었다. 그의 왼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렸고, 타자기를 두드려 시를 썼다. 브라운의 ‘발로 그린 그림’과 ‘발로 쓴 글’은 영화가 되었다. 짐 셰리던이 감독을 맡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열연한 ‘나의 왼발(1989)’이다. 브라운의 왼발은 손의 대체 기관이 아닌 독립 기관이며, 뇌의 신경과 심장의 혈관이 닿는 유일한 활개다. 그 절실한 나뭇가지 끝에서 피어난 미술과 문학의 꽃이 아름다운 날개를 편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오르간은 신의 악기다. 솟아오른 거대한 파이프들의 성당의 첨탑을 보좌하고 겹겹이 늘어선 흑백의 건반이 천지를 공명한다. 예배당이 오르간의 울림통이 될 때, 성당과 음악과 신은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신성한 오르간을 발로 연주한다. 바흐의 ‘Pedal - Excercitium(페달 연습)’ BWV598은 오르간의 발 건반으로만 연주하는 즉흥 연습곡이다. 즉, ‘발로 한 연주’다. 더럽고 천한 발로 우직하게 밟아야 하는 이 곡은 불경인가? 일단 들어보자. 음악이라기보단 진동에 가까운 흔들림은 땅 가장 깊은 곳에서 나와 하늘 가장 높은 곳을 향한다. 놀라운 발놀림이 중력의 핵부터 무중력의 신성을 파동으로 연결한다. 300년 전, 바흐는 중력을 밟고 상승하는 법을 깨달았다. 
 
Shoes Tree - 황지해 (2017) / (jihaeh.com/shoes-tree, zzikke.tistory.com/entry)
Shoes Tree - 황지해 (2017) / (jihaeh.com/shoes-tree, zzikke.tistory.com/entry)
 
버려진 신발은 중력장이라는 전장에서 전사한 발의 옛 전우다.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는 2017년 서울역 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에 버려진 신발 3만 켤레와 식물을 쌓은 설치 작품 ‘슈즈 트리(Shoes Tree)’를 전시했다. 폐신발은 우리의 발이었다.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발에서 식물이 자란다. 황지해의 작품에서 우리가 버린 발은 중력을 버리고 생명을 버텨낸다. 버림과 버려짐, 발과 신발 그리고 중력과 극복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개념 예술, 공공 예술이었지만 흉물 논란으로 단 7일 만에 철거되었다. 버려진 신발이 흉한 원인은 우리의 발 때문인데 이상하다. 안타깝다. 우리 사회는 같은 중력장을 딛고 서 있지만 아직 전우애가 부족하다. 버려진 군화에서 중력을 극복한 나무가 자라고 그 나뭇가지 끝에 꽃이 피길 바라본다. 
 
아킬레우스의 죽음 - 루벤스 (1630~1635) / (Wikimedia,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아킬레우스의 죽음 - 루벤스 (1630~1635) / (Wikimedia,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죽어가는 아킬레우스 - 헤르터 (1884) / (Wikimedia)
죽어가는 아킬레우스 - 헤르터 (1884) / (Wikimedia)
탈로스의 죽음 / (Wikipedia,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el Sannio Caudino, Montesarchio)
탈로스의 죽음 / (Wikipedia,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el Sannio Caudino, Montesarchio)
 
사실 발의 수난은 예수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발은 어처구니없는 약점이었다. 반신(半神)이자 무적의 용사인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은 머리나 심장이 아닌 고작 발뒤꿈치다. 물론 실제 전장에서 이동 능력 상실은 치명적이지만,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가 겨우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고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미천한 신체 부위인 발에 도사리고 있던 죽음 덕에 인류의 두 발뒤꿈치 힘줄에는 아킬레스건(Archilles tendon)이라는 이름이 박히게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발의 비극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된다. 아킬레우스는 사후 세계에서 그리스 신화 최고의 미녀 헬레나와 결혼해 총명한 아들 에우포리온을 얻는다. 에우포리온의 어원은 ‘발이 가벼운 자’다. 날개가 달린 채 태어난 에우포리온은 남부러운 것 없었다. 하지만 그 교만함 때문에 제우스의 미움을 샀고 번개에 맞아 이카로스처럼 추락해 죽는다.절름발이에 추남이지만 손재주가 뛰어났던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그가 제작한 청동 거인 탈로스의 약점도 발뒤꿈치다. 아킬레우스는 발에 화살이 박혀 죽었지만, 거인 탈로스는 발에 있던 못이 빠져 죽었다. 깡통 로봇 같은 거인의 몸 안은 ‘신의 피’로 가득 차 있는데 유일한 마개가 뒤꿈치에 있는 못이다. 아르고 원정대의 이아손과 마녀 메데이아가 이 못을 뽑았고 중력에 의해 신의 피가 모조리 뽑힌 거인은 쓰러진다. 과다 출혈로 무너진 거인의 이름은 우리 발의 족근골(tarsal bone) 중 거골(talus)로 새겨졌다. 
 
발의 근골격 도해 / (www.woburnosteopaths.co.uk/2019/03/your-achilles-heel/)
발의 근골격 도해 / (www.woburnosteopaths.co.uk/2019/03/your-achilles-heel/)
 
영웅의 끊어진 발과 거인의 무너진 발은 아직도 우리 몸속에 살아 꼿꼿이 중력을 버티고 있다. 그렇게 신화는 체득된다.
 
(왼쪽)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 - 틴토레토 (c.1575~1580) / (Wikipedia, Nationalgallery, uk), (오른쪽)파우스트와 헬레나 - 카우바흐 (1860) / (www.researchgate.net/figure/Wilhelm-von-Kaulbachs)
(왼쪽)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 - 틴토레토 (c.1575~1580) / (Wikipedia, Nationalgallery, uk), (오른쪽)파우스트와 헬레나 - 카우바흐 (1860) / (www.researchgate.net/figure/Wilhelm-von-Kaulbachs)
 
예수가 나타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신화의 발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예수 사후 1800년이 지나 신화의 발이 부활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다. 비극 2부에서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지향과 방황의 인간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차지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이포리온(에우포리온)을 낳는다. 가벼운 발과 경박한 성품으로 중력을 거스르려던 오이포리온은 파우스트와 헬레나 발치에 떨어져 죽는다. 아들의 죽음을 목도한 헬레나는 신화 속으로 사라지고, 염소 발굽의 절름발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향하는 악마와 방황하는 인간 파우스트의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중력에 억눌린 발은 못생기고, 더럽고, 고되고, 약하다. 신도, 영웅도, 거인도, 피도, 악마도, 학자도 중력의 발치에선 비극일 뿐이다. 이런 중력의 족쇄를 극복하려는 발버둥이 태곳적부터 있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크리스티 브라운의 발 그림, 바흐의 발 음악, 황지해의 신발 정원을 가볍게 초월한다.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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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중석기 시대의 무용수들 - 밤베트카 유적 / (Wikipedia), (오른쪽)삼지창 지팡이를 들고 춤추는 남자 - 밤베트카 유적 / (Wikipedia)
(왼쪽)중석기 시대의 무용수들 - 밤베트카 유적 / (Wikipedia), (오른쪽)삼지창 지팡이를 들고 춤추는 남자 - 밤베트카 유적 / (Wikipedia)
악사들과 무용수들 - 네바문 무덤 벽화 (c. 1350 B.C.) / (Wikipedia)
악사들과 무용수들 - 네바문 무덤 벽화 (c. 1350 B.C.) / (Wikipedia)
 
언어 이전에 몸짓이 있었을 것이다. 춤은 인류, 아니 생명의 기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중력은 생명보다 먼저였다. 중력장에서 진화를 계속한 생명은 인류가 되었고, 새가 되지 못한 인류는 땅에서 발을 떼려는 몸부림으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춤은 중력 극복의 욕망이었고 동시에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충족이었다. 이 시지프 같은 부조리와 반항의 긴 굴레에서 춤은 의지가 되고 예술로 진화한다. 발은 춤의 무모한 반항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걷고, 서고, 뛰어올랐다. 
 
몸짓과 언어 사이의 어느 때쯤에서 그림이 옛 춤을 남겼다. 중(中)석기 시대인 1만 년 전 인도 유적 빔베트카에도, 3300년 전 고대 이집트 벽화에도 춤이 멈춘 채로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어 언어도 춤을 기록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과 철학에 춤이 문자로 박혀있다. 그림과 언어의 춤에는 시간과 움직임이 없다. 최초의 예술인 춤은 움직임을 남길 수 없기에 미술과 문학보다 몇 발짝 물러나게 된다. 이는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악보라는 그림-언어의 창제로 음악은 뒤늦게나마 미술, 문학과 보폭을 맞췄지만, 무보(舞譜; 춤의 동작을 악보처럼 기호로 표현한 기록)나 동영상 녹화 장치가 나오기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요원한 극복과 거세된 움직임. 춤의 지난한 시간은 고스란히 발에 퇴적된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0/2017092002441.html)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0/2017092002441.html)
발레리나 강화혜의 발 / (www.hani.co.kr/arti/culture/music/70958.html)
발레리나 강화혜의 발 / (www.hani.co.kr/arti/culture/music/70958.html)
 
굳은살과 흉터로 변형된 발레리나의 발에 숭고해진다. 더럽지만 고귀하며, 고되지만 가볍다. 흉하고 약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강력하다. 이 숭고의 근원에는 한 무용수의 피땀 어린 시간과 중력을 초월하려는 발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투쟁과 고통 그리고 생명과 환희까지 품어낸 발의 의지는 미추와 선악을 아득히 넘어선 강하고 고귀한 힘이다. 
 
어린 바쿠스(Bacchanale; 디오니소스 축제) - 부그로 (1884) / (Wikimedia, Nationalmuseum, Stockholm)
어린 바쿠스(Bacchanale; 디오니소스 축제) - 부그로 (1884) / (Wikimedia, Nationalmuseum, Stockholm)
 
중력의 발바닥 아래 깔려 있던 춤을 아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린 사람은 철학자 니체다.
니체의 철학은 디오니소스를 긍정하고, 디오니소스라면 광기의 축제며, 축제는 춤이다.
니체의 거의 모든 저서에서 춤은 초인(招人; Übermensch)의 몸짓이다. 중력을 극복하는 자 니체. 그의 춤추는 초인 ‘차라투스트라’의 말씀을 들어보자.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정동호 옮김, 책세상)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정동호 옮김, 책세상)
 
높은 곳의 신은 죽었지만, 철학이란 신발을 신은 발은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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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무용에 질세라 미술도 다양한 미학으로 중력 해방 전쟁에 참전한다.
 
그리스도의 승천 - 달리 (1958) / (www.dalipaintings.com/the-ascension-of-christ.jsp)
그리스도의 승천 - 달리 (1958) / (www.dalipaintings.com/the-ascension-of-christ.jsp)
 
달리는 죽은 신이 중력을 극복하는 장면을 그렸다. 1950년에 달리는 ‘우주적인 꿈’을 꾼 후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리스도가 향하는 빛의 우주는 노란 원자다. 우주와 원자가 합일하면서 성화(聖畵)는 초현실의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코스모스와 마이크로코스모스를 연결하는 놀라운 발상 안에서 발은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 
 
(왼쪽)붉은 모델 - 마그리트 (1935) / (Wikiart, Georges Pompidou Center, Paris), (가운데)신은 성인이 아니다(Dieu n’est pas un saint) - 마그리트 (1935~36) / (www.nature.com/articles/s40494-018-0198), (오른쪽)무장해제된 사랑(L'amour désarmé) - 마그리트 (1935) / (www. fashionlandscapeblog.tumblr.com/post)
(왼쪽)붉은 모델 - 마그리트 (1935) / (Wikiart, Georges Pompidou Center, Paris), (가운데)신은 성인이 아니다(Dieu n’est pas un saint) - 마그리트 (1935~36) / (www.nature.com/articles/s40494-018-0198), (오른쪽)무장해제된 사랑(L'amour désarmé) - 마그리트 (1935) / (www. fashionlandscapeblog.tumblr.com/post)
 
마그리트는 담백하다. 무덤덤한 화가는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방식으로 발을 가볍게 한다. 마그리트 안과 겉, 벗음과 벗겨짐, 인간의 피부와 동물의 가죽, 땅과 하늘, 정수리와 발바닥의 고정관념과 경계를 허문다. 붕괴의 파장은 가볍게 현실을 초월하고 중력을 무장해제 시킨다. 만약 살신(殺神)한 니체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화가가 무너뜨린 울림에 맞춰 실성한 듯 춤췄을 것이다. 
 
(왼쪽에서 첫 번째)서 있는 여자 - 자코메티 (1958), (두 번째)걷는 남자2 - 자코메티 (1960), (세 번째)추락하는 남자 - 자코메티 (1950), (네 번째)베니스의 여인2 - 자코메티 (1956)
(왼쪽에서 첫 번째)서 있는 여자 - 자코메티 (1958), (두 번째)걷는 남자2 - 자코메티 (1960), (세 번째)추락하는 남자 - 자코메티 (1950), (네 번째)베니스의 여인2 - 자코메티 (1956)
 
존재의 예술가, 실존주의가 사랑한 조각가 자코메티. 앙상한 몸통에 비해 유난히 큰 발은 존재라는 점에서 내린 ‘수선의 발’처럼 세계에 닿는다. 자코메티는 이 조각들을 이용해 중력을 0으로 만들거나 정의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설명을 위해 간단한 과학과 수학이 필요하다. 
 
중력의 힘 공식 / (www.blog.naver.com/sansisan/222209951535)
중력의 힘 공식 / (www.blog.naver.com/sansisan/222209951535)
 
중력의 힘(F)을 구하는 공식이다. 한마디로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커지고, 두 물체의 거리가 멀수록 작아진다. 여기에 자코메티의 작품을 대입해 보자. 지구의 질량을 m1, 자코메티 작품의 질량을 m2 그리고 둘 사이의 거리를 r이라고 하자. 그리고 이성의 물리와 수학을 놓고 상상의 예술과 미학으로 풀어보자. 
얇디얇은 자코메티의 작품들은 부피가 휘발될 만큼 앙상하다. 부피에서 평면으로, 평면에서 선을 향한 질량 m2는 점을 상상하면서 0에 수렴하고, 감쇄된 차원에서 중력은 와해한다. 우리는 무중력으로 휘발된 부피의 냄새로 존재를 인지할지도 모른다. 지표면에 쇠꼬챙이같이 박힌 그의 작품은 밀도를 빨아들이면서 지구 중심을 향해 끝없이 파고들 것만 같다. 블랙홀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밀도가 자코메티의 미학이다. 작품과 시선은 존재의 근원으로 침잠하면서 두 물체가 맞닿는다. 분모 r이 0이 되면서 중력은 정의할 수 없게 된다. 자코메티는 유난히 큰 발로 존재를 애써 유지한다. 그에게 발은 지구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존재를 붙잡아 놓는 걸쇠이자 쐐기며, 세계로 기투(企投; entwurf)된 현존재의 발디딤이다. 
 
(왼쪽)이카루스 - 마티스 (1947) / (www.kunst-meditation.it/en/modern-art/matisse-ikarus), (오른쪽)파란 무용수 - 마티스 (1947) / (www.metmuseum.org/art/collection)
(왼쪽)이카루스 - 마티스 (1947) / (www.kunst-meditation.it/en/modern-art/matisse-ikarus), (오른쪽)파란 무용수 - 마티스 (1947) / (www.metmuseum.org/art/collection)
 
자코메티가 큰 발과 ‘부피 없는 질량’으로 중력을 극복했다면, 마티스는 ‘질량 없는 부피’와 발을 없애 구름 같은 중력을 만들어낸다. 노년의 마티스는 구아슈(gouache) 색종이를 가위로 잘라 그림을 완성하는 ‘Cut-Out’ 기법을 구사했다. 1947년에 완성된 일러스트집은 연극과 서커스가 주제였지만, ‘Jazz’라는 음악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다. 이 중 두 작품에 주목해 보자. 부드러운 곡선의 이카로스도, 음악 같은 곡률의 파란 무용수도 발이 없다. 시간이 멈춘 공간이기에 종이 인간이 양의 상승 값인지, 음의 하강 값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코메티의 수학처럼, 마티스의 질량을 부피로 나눠 밀도를 구하지 말자. 중요한 건 중력이 희미한 공간에서 발이 없는 둘이 구름처럼 자유롭다는 것이다. 구름의 곡률과 밀도에는 수학 따위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
 
달 표면의 우주 비행사 발자국 (1969) / (www.science.nasa.gov/resource/close-up-view-of-astronauts-footprint)
달 표면의 우주 비행사 발자국 (1969) / (www.science.nasa.gov/resource/close-up-view-of-astronauts-footprint)
 
1969년, 과학의 힘을 빌린 인류의 발은 마침내 지구의 중력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7월 20일, 지구 중력의 1/6인 달에 첫 발자국을 남겼다.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의 발은 인류 최초로 두 행성의 중력을 퇴적한 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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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땅을 지나간 뒤로는 이제 더 이상 똑같은 중력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 앙토냉 아르토가 남긴 말이다. 이 문장에서 ‘그’는 우주 비행사가 아니다. ‘반 고흐’다. 
연극에서 길을 잃은 화가 아르토는 자신의 저서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의 서문에서 고흐와 중력에 관해 말한다. 
 
 “내가 그(고흐)의 내부에 있음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화가의 천분이 아닌, 평생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철학자의 천분이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시선을 지니지 않았다. 반 고흐 이전에는 불행했던 니체가 유일하게 이런 시선을 지녔었다. 영혼의 굴레에서 육체를 해방하고 마침내 인간의 육체까지도 벗겨내는 시선. 반 고흐는 허공에 있고, 한껏 죄어져 있다.”
 
아르토는 고흐에게서 니체의 중력을 본다. 후대의 철학자들은 고흐의 신발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데리다는 해체를 추출해냈다. 이 두 철학자는 니체의 철학적 족보에 적힌 적자들이다. 
 
신발 (1886) - 반 고흐 / (Wikipedia, Van Gogh Museum, Amsterdam)
신발 (1886) - 반 고흐 / (Wikipedia, Van Gogh Museum, Amsterdam)
 
이 그림 한 장에 지금까지 발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못나고, 더럽고, 고되고, 약한 발. 폐기와 재생, 지향과 방황, 생명과 죽음, 비극과 초월, 상승과 하강, 경계와 모호, 부피와 질량, 승천과 추락의 발. 그런데 이 그림에는 발이 없다.
중력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부재(不在)다.
발이 없는 가장 위대한 발 그림에서 퇴적된 중력은 승화된 부재로 극복된다.
그렇게 무중력의 발은 아름다운 부재를 향해 진화할 것이다.
이 확신에는 사족이 없으며 각주 따위도 필요 없다.   
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 총체극단 '여집합' 단장.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기획 및 연출을, 여러 극단에서 극작과 연출을 맡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철학으로 유리알 유희를 하며 여러 유형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클락헨'(2020), 기록문학 '그 의사의 코로나'(2022), 소설 '악의 유전학'(2023)을 출간했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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