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시간의 견고함 담은 부드러운 비누… ‘신미경’이 빚은 과거와 현재

입력 : 2024.06.05 13:30

[신미경]
제2회 하인두예술상 수상 기념전 ‘신화장구지 新花長舊枝’
‘고스트 시리즈’, ‘라지 페인팅’, ‘화장실 프로젝트’ 등 작업 총망라
14일부터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

‘고스트 시리즈’ 디테일컷. 도자기처럼 반짝이는 표면의 질감이 돋보인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고스트 시리즈’ 디테일컷. 도자기처럼 반짝이는 표면의 질감이 돋보인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풍화 프로젝트, 2023, soap, 15ⅹ15ⅹ22cm. /아트조선
풍화 프로젝트, 2023, soap, 15ⅹ15ⅹ22cm. /아트조선
‘라지 페인팅’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라지 페인팅’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작품 옆에 선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작품 옆에 선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수천 년의 시간이 잠들어있는 고고학 박물관 같다. 그리스 고전 조각, 페르시아 유리 공예품을 닮은 조각 작품이 줄지어 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이 흘러 풍화되고, 마모된 유물 같다. 그러나 이는 모두 신미경(57)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옛 유물을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부드럽고 무른 비누를 사용해 지금 이 순간, 시간을 재구성하고 과거와 현재 사이 세련된 시차를 만든다. 신미경의 작품은 가만히 정지해 있기를 거부한다. 전시장 외부에서 비와 바람을 맞으며 흘러간 시간이 작품에 흔적으로 새겨지거나, 화장실에서 실제로 사용되며 작품을 오간 손의 흔적을 간직해 그 또한 ‘작품화’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비누의 연약한 물성을 더욱 극대화함으로써 기존 대상이 지닌 원본성에 대한 가치론적 질문을 던진다.
 
작업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작업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작년, 작가 신미경은 고유의 비누 작업으로 한국성을 담보한 국제성을 인정받아 제2회 하인두예술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제2회 하인두예술상 심사위원장을 맡은 안현정 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은 “풍화되고 사라지는 비누의 물성을 권위주의의 해체로 본 신미경은 아시아 여성작가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부단히 자기 개성화의 길을 걸어왔다. 동서 문화의 맥락을 새로운 담론과 방향성으로 번역해 온 예술 인류학자 같은 여정은 향후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심사평을 전했다.
 
제2회 하인두예술상 수상을 기념해 신미경 개인전 ‘신화장구지 新花長舊枝’가 6월 14일부터 7월 13일까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갈색 ‘고스트 시리즈’와 대형 작업인 ‘라지 페인팅’ 시리즈, ‘화장실 프로젝트’ 등 과거부터 이어져 온 다양한 작업을 총망라해 선보인다. 또한 전시장의 화장실에서 신미경의 실제 작품을 사용해 볼 수 있으며, 닳아 없어지는 작품 과정에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다.
 
지난 5월, 작가 신미경을 만나기 위해 금천구 작업실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비누가 선사하는 향이 감각을 사로잡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생생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비누로 만들었다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다.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frame, soap, fragrance and colourance, 201ⅹ160ⅹ5cm. /코리아나미술관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frame, soap, fragrance and colourance, 201ⅹ160ⅹ5cm. /코리아나미술관
 
─지난해 제2회 하인두예술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하인두예술상은 독창성을 모색하고 예술을 향한 열의를 꽃피웠던 하인두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한 작가에게 상을 수여합니다. 처음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조각을 공부했기 때문에 하인두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길에만 정진하셨던 분의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그간 30년 동안 작업에만 매진해 온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중간 정도 온 것 같은데, 돌아보면 굉장히 많이 왔지만 또 앞으로 갈 길도 멀어서 더욱 열심히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실에 향이 가득합니다. 비누라는 재료 특성상 향까지 의도하신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께서는 비누로 고전적인 공예품을 표현해 오셨습니다. 무르고 부드러운 비누로 과거의 유물을 만들어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물을 비누로 만들어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셨나요?
 
사실 ‘유물’이라는 건 귀중함을 동반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물의 값어치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유물을 만들었던 제작자는 본인의 작품이 유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를 테고, 또한 유물이 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닐 거예요. 유물은 과거에 동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이었을 거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건 ‘유물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다’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제 작품도 제 손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이 49퍼센트라고 한다면,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이를테면 비를 맞거나, 사용해서 닳아 없어지는 등의 변화가 51퍼센트입니다. 그 두 가지 과정을 다 거쳐서 전시장에 나왔을 때는 또 다른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거죠.
 
고스트 시리즈, 2008, soap, varnish, colourance and fragrance, 69ⅹ43ⅹ43cm. /아트조선
고스트 시리즈, 2008, soap, varnish, colourance and fragrance, 69ⅹ43ⅹ43cm. /아트조선
고스트 시리즈, 2008, soap, varnish, colourance and fragrance, 93ⅹ40ⅹ40cm. /아트조선
고스트 시리즈, 2008, soap, varnish, colourance and fragrance, 93ⅹ40ⅹ40cm. /아트조선
 
─또, ‘고스트 시리즈’는 속을 파내는 작업을 통해 유리병처럼 맨질맨질하고 투명한 질감을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누라는 소재 특성상 많이 깨지고 무너지기도 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법으로 ‘고스트 시리즈’를 표현해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소한의 형태만, 아웃라인만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를 들여다보고 그 중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의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안을 파낼 생각을 못 했는데요. 도자기 형태의 작품을 비누로 만들게 됐는데, 입구가 비누로 차 있으면 도자기처럼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씩 안을 파내기 시작했고. 그러다 얇게 파내면 유리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기서 ‘고스트 시리즈’가 탄생하게 됐네요.
 
풍화 프로젝트, 2023, soap, 53ⅹ26ⅹ18cm. /아트조선
풍화 프로젝트, 2023, soap, 53ⅹ26ⅹ18cm. /아트조선
화장실 프로젝트, 2004, soap, 39ⅹ15ⅹ20cm. /아트조선
화장실 프로젝트, 2004, soap, 39ⅹ15ⅹ20cm. /아트조선
 
─‘풍화 프로젝트’는 야외의 환경에 따라 닳아 없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작업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일단 조각은 야외에 설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회화와 차별화를 가집니다. 그런데 비누로 만들어진 조각이 비를 맞는 야외에 설치된다고 가정한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아찔한 경험이 되는 거죠. 작품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자연스레 상상하게 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비눗방울만 남을까? 외부 환경을 멀쩡하게 견뎌낼까? 이런 식으로요. 대리석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2,000년 이상 걸려 변하는 모습을 비누는 2년 만에 보여줍니다. 비누의 시간이 더 빠른 거죠. 이를 통해 작품 스스로가 퍼포밍을 합니다.
 
‘화장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실에서 사용되던 비누가 미술관으로 들어오면 다른 맥락으로 작용합니다.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비누라는 성질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대신 장식성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 꽃병이었고 못이었던 물건이 오랜 시간이 지나 박물관에 들어와 선반 위에 전시된다면 그것은 꽃병도 아니고 못도 아니게 됩니다. 기존의 기능을 잃고 다르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 점에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건이 유물로 바뀌게 되는 시간을 정지시키고 현대 미술로 가져와 재현하는 것입니다.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frame, soap, fragrance and colourance, 201ⅹ160ⅹ5cm. /코리아나미술관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frame, soap, fragrance and colourance, 201ⅹ160ⅹ5cm. /코리아나미술관
 
─‘라지 페인팅’의 경우에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기존 조각 작업보다는 조금 더 회화에 가까운 듯합니다. 액자 또한 존재감이 있고, 해외의 미술관에서 보일 법하고, 또한 고풍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화에 가까운 이 작업마저도 비누로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이름 자체는 페인팅이지만, 마찬가지로 조각 작품입니다. 도자기처럼 만든 작품, 조각상처럼 만든 작품 모두 기존의 미술 언어를 제 작업의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온 겁니다. 각 시리즈 마다 가지는 맥락이 있습니다. 라지 페인팅 시리즈의 경우에는 제가 직접 제작한 액자에 많은 양의 비누를 녹여 붓습니다. 그것이 색이나 다양한 형태로 융화가 되면서 굳어버리는 과정 역시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되어짐’의 다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존에 선생님께서 ‘라지 페인팅’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작품에 반만 관여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말씀하신 ‘되어짐’과도 연결이 되는 부분 같은데,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색과 투명도가 다른 비누 200kg가량을 녹여 각각의 버킷에 담은 뒤, 한 번에 액자에 붓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반 이상은 컨트롤이 불가능하고, 그날, 그 순간의 해프닝이 됩니다. 아마 이 작품은 전시장에서 보편적인 추상 회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제가 만드는 과정은 굉장히 역동적입니다. 엄청난 무게와 액체의 흐름과 다양한 움직임이 모두 이 액자 안에 담겨있죠. 그래서 정지해 있는 추상회화처럼 보이기도, 역동적인 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간극이 저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증거가 됩니다.
 
─이번 전시는 수상 기념전인 만큼 한 가지 작업에 집중하기보다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입니다. 아마 ‘새 꽃은 옛 가지에서 나온다’라는 뜻을 가진 이번 전시 제목 ‘신화장구지 新花長舊枝’와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전시 제목은 어떻게 선정하게 되셨나요?
 
저를 모르셨던 분들에게 전체적인 작업의 경향이나 제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태도를 보여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해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제 작업은 완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기보다는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많은 것 중 하나를 현대 미술로 끌고 나와서 과거와 현대 사이를 어떻게 읽어내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새로움을 위해 과거의 것을 읽어내는 새 꽃은 옛 가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흥미롭게 와닿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 전반적인 자세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최근 신진 작가나 원로 작가를 조명하는 자리가 많아진다는 것이 체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각으로는 40~50대 중견 작가를 조명하는 자리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어느덧 30년간 작업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오실 수 있었나요?
 
사실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항상 멀리 쳐다보면 막막한 게 작가의 삶이죠. 제가 뭐 특별히 버틴 건 없지만, 바로 다음 프로젝트를 마지막 프로젝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임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도 모르고, 아마 그 누구도 모를 거예요. 그러나 운이 좋게 그다음, 또 그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십 년 뒤의 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 역시도 예측하기는 어려운데요(웃음). 좀 더 활발하게 작업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면에서는 좁고 깊은 작업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바람은 넓고 깊은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선보일지 저부터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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