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5.14 11:00


백남준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발명되기 15년 전인 1974년, 이미 인터넷을 예상하고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란 단어로 현대사회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했다. 1990년대에 1세대 넷아트가 등장했고, 2000년대 초반 웹 2.0 운동이 이어졌으며, 계속해서 진화해 오늘날 현대 미술에 통합되었다. 백남준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들은 사이버 공간뿐만 아니라 인간 연결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정보를 전송, 전파하고 사용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탐구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위대한 예술가들에게서 우리는 미래의 어떤 모습을 엿볼 수 있을까?
지난 5월 2일 저녁, 구겐하임 미술관에 슈리칭(Shu Lea Cheang) (b. 1954, 대만)이 나타났다. 70대의 여전사. 70세의 작가에게 전사와 같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싶겠지만 그녀의 아우라와 지난 30여 년간의 작업들은 전사라는 단어를 쉽게 뛰어넘는다. 1990년대에 창작 매체로서 인터넷의 잠재력을 탐구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뉴미디어 아트의 역사를 미리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구적인 프로젝트들을 이어온 작가이다. 1970년 뉴욕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한 슈리칭은 현재 파리에 거주하는 대만계 미국인 예술가로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사이버 인터페이스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인종, 제국주의, 동성애, 젠더, 권력을 탐구해 왔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며 기존 관습을 벗어난 자유로움은 그녀만의 범상치 않은 화법과 영상코드로 남았다.


제 2회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인 슈리칭의 '퍼포먼스 렉쳐'를 보기 위해 구겐하임 미술관에 많은 관객들이 자리했다. LG전자의 후원으로 구겐하임에서 아트앤테크놀로지 학예연구를 맡은 노암 시걸(Noam Segal) 큐레이터와 함께 ‘도대체 이게 뭐야: 해킹 전술, 바이러스 확산, 괴짜 파밍에 대한 슈리칭의 이야기(What the Heck: Shu Lea Cheang on Hacking Tactics, Virus Becoming, and Geek Farming)’라는 키워드로 그간의 작업들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가의 이름을 뉴욕에 알린 작업은 1994년도에 제작한 프레시 킬(Fresh Kill)이라는 환경풍자적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영화이다. 뉴욕 맨하튼 아래 위치한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이 핵 쓰레기와 연루된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다. 뉴욕시를 소비주의적 잔해의 독성 폐기물 처리장으로 상상하는 영화는 지금 시대에도 꽤 ‘프레시'하게 느껴진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영구 소장한 최초의 인터넷 예술 작품인 ‘브랜든(Brandon)’(1998-1999)도 슈리칭의 주요 초기 작업 중 하나이다. 네브래스카주에서 트랜스젠더 남성 브랜든 티나(Brandon Teena)가 당한 실제 강간과 살인에 대한 웹 프로젝트로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하여 인터랙티브한 참여형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은 시청자가 직접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마음껏 움직이면서 사건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나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슈리칭은 그녀를 뉴욕 미술계에 각인시킨 이 작업을 마지막으로 뉴욕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2000년대부터는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며 장르를 초월한 장편영화와 퍼포먼스 작업을 확장해 왔다. 201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플루이도(Fluidø)’는 2060년대 미래에 생긴 유전자 돌연변이에 대한 영화이지만 포르노그라피적 영상으로 초연에는 관객의 대부분이 상영 중 퇴장한 사례가 있었을 만큼 노골적이고 솔직했다. 다음 해에 광주 비엔날레에서 ‘UKI 바이러스 라이징(UKI Virus Rising)’(2018)라는 게임 소프트웨어로 생성된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을 결합한 두 개의 평행 스토리 라인 SF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뉴욕에서 에이즈 위기를 겪은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행동을 촉구하고, 동원하고, 침투하고, 전복시키는 힘을 가진 새로운 바이러스를 불러낸다. 201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대만관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감시 사회를 빗댄 감옥 형태의 미디어 설치 작품 ‘3×3×6’(2019)을 선보였다. 대만관의 장소 특정적 설치물은 성적 일탈 행위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16세기부터 1920년대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자 카사노바가 투옥되었던 건물인 팔라조 델 프리지오니(Palazzo delle Prigioni)에서 전시되었다. 얼굴 인식 기술을 사용하여 방문자의 얼굴을 뒤섞어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감시에 저항하게 만드는 설치물로 큰 반향을 이뤘다.



2020년 이후에는 생명공학을 탐구하는 작가가 ‘나의 관심은 과학이 소설과 만났을 때 그러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이라며 바이오기술 과학자들 사이의 단편적인 대화 기록과 "해킹된" 실내 조명이 빨간색으로 빛나는 재현된 허구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영상작업도 한 바 있다. 작가는 1980년대 비디오 아트에서 1990년대 사이버 공간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우리가 디지털 아트라고 부르는 것으로의 모든 경험을 한 세대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의 일은 시스템을 해킹하는 일’이라는 작가는 미디어 기술을 통해 삶을 탐구한다.
또한 2021년부터는 지속되는 환경문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비롯해 사회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뉴욕 북부에 위치한 기술과 농업이 교차하는 괴짜 농장 단체인 CycleX를 설립해 '괴짜 농업' 을 연구하고 있다. 균류학자와 예술가들을 모집해 새로운 기술과 전통적인 지식 방식 사이의 관계, 땅과 물이 서로 그리고 우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고 형성되는지를 조명한다. 퇴비 제조와 토지를 생산·분해·재생하는 자급자족 식량 생산 주기에 대한 DIY 기술 혁신을 포함하는 괴짜 농업 장르를 정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참여적이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설치와 멀티플레이어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작가는 “작품이 ‘인터랙티브’한 장치와 디자인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활성화’하기를 바란다”고 하며 “내 예술은 다양한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는 삶을 사는 데서 비롯된다.”고 작업의 핵심을 피력했다. 인공지능, 가상 현실, 생명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예술 작품에 접목하는 데 앞장서 온 작가의 탐구는 뉴미디어 아트에서 가능한 것의 경계를 넓히고 혁신적인 도구와 기법을 실험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LG 관계자는 “국제 심사단이 주목한 선구자 정신과 부단한 실험정신이 LG가 이 상을 통해 글로벌 고객과 공유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가치”라며 지난 4월 구겐하임 YCC 파티에서 슈리칭의 이번 수상을 크게 반긴바 있다. LG 구겐하임 어워드의 경우, '후원 (스폰서십)'을 넘어 다각적인 '협력 (파트너십)'인 점이 특별하다. 기술이 현대예술의 표현과 경험을 확장하는 매개체이자 조력자 라는 관점을 공유하며 함께 일으킨 이니셔티브인 만큼, 뮤지엄의 퍼블릭 프로그램이나 작가들의 작품구현에 LG의 원천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LG 구겐하임 아트 앤 테크놀로지 이니셔티브는 예술과 기술의 접점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연구하고, 기리고, 홍보하기 위해 구겐하임과 LG가 5년간 다각도로 협력하는 프로젝트이다. 매년 기술 기반 예술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룬 예술가 한 명을 선정하여 10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 지난 제1회 수상자인 AI 예술가 스테파니 딘킨스(Stephanie Dinkins)에 이어 슈리칭 그리고 2027년까지 매년 한 명씩, 3명의 아티스트가 더 수혜를 받게 될 예정이다. 내년도엔 어떤 아티스트가 놀라움을 주게 될까? 누가 아는가, LG 구겐하임 어워드에 선정되는 5명의 아티스트들의 작업들 속에 이미 우리 미래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을지?
◆전영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이자 Iron Velvet 아트의 대표다. 다양성, 소수성, 경계 등을 주제로 예술과 사회, 도시와 개인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고려대 미술학부와 불문학과 졸업 후, Pratt Institute에서 문화예술경영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Brooklyn Museum, Asia Contemporary Art Week, The Armory Show 등에서 전시팀 업무를 했고, AHL Foundation에서 Curatorial Fellow를 지냈으며, 전 Space 776 갤러리의 부디렉터이자 Skowhegan Art Council 멤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