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2.20 14:51
김희천·성시경·우정수·탁영준 작가 4인
주요 영상 작품과 신작 회화 한 자리에
3월 9일까지 성북동 B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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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입구역부터 시작해 성북동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여러 상점과 젊은 감각이 묻어나오는 카페, 그리고 동시대 예술 작품이 있는 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성북동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세월과 감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매력을 가진 성북동에서 3월 9일까지 갤러리 BB&M의 김희천(35)·성시경(33)·우정수(38)·탁영준(35) 그룹전 ‘언센티멘탈 에듀케이션(Unsentimental Education)’이 열린다. 4명의 작가는 BB&M의 젊은 전속 작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제나 매체 등의 표현 양식에서는 저마다의 개성을 보여주며, 관람객은 이를 통해 더욱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당대 감성적 특이성과 의식을 투명하게 드러낸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소설 ‘감정 교육(Sentimental Education)(1869)’에 빗대어, 오늘의 감수성과 미감을 이성적 사고와 논리를 통해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젊은 예술가에 주목한다. 전시에서는 가상과 현실, 사회문화적 차이와 경계,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며 발전시킨 작가 4인의 주요 영상 작품과 신작 회화를 소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우정수의 회화 작품은 즉흥성이 돋보이는 추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중 미디어에서 봤을 법한 캐릭터와 삽화가 묘사돼 있다. 이러한 맥락을 벗어난 유쾌한 이미지는 무질서하고 거침없는 배경과 대조되며 더욱 복합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또한 이번 신작은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화면 위의 수많은 레이어가 겹쳐 있는데, 다양한 문화와 취향을 기호화한 패턴의 패브릭, 그리고 작가의 유년 시절 만화 속에서 접했을 법한 캐릭터의 모습이 뒤섞여있다. 이들은 거대한 이미지의 파도 위에서 서로 전복되고, 끊임없이 생성되며 현재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풍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전속작가로 영입된 후 처음으로 BB&M 전시에 참여한 탁영준은 영상에서부터 조각, 평면,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인간의 믿음과 신념 체계를 구성하는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관찰하며 과학과 기술을 초월한 믿음이 사회와 집단적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과 그 구조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컬렉션인 율리아슈토쉑재단(Julia Stoschek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현재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번 출품작인 ‘Wohin?(2022)’은 퀴어에 대한 일부 혐오적 시선에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종교적 신념이 사회 규범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포착하며 주제 의식을 상징화한 미장센과 오라토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화음은 내러티브에 깊이를 부여한다.

최근 런던 헤이워드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개인전을 가진 김희천은 기술이 구축해 낸 세계의 작동 방식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통해 현대인이 경험하는 독특한 인지적 감각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초기 작품인 ‘바벨(2015)’이 상영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작가는 탈락된 신체성과 가상현실화된 시공간으로 인해 혼돈을 느끼는 자신과 주변의 상황에 주목하는데, 이는 페이스 스와프 앱, 게임,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와 친숙한 코드를 자연스럽게 작품에 활용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성시경의 작품을 보면, 추상적인 배경 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얇은 선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 여러 갈래 선의 향방을 눈으로 좇다보면 어느새 작품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유는 색감에 있다. 작품 전체에 퍼져있는 여러 색은 어느 하나의 지점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총체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형태는 직관적이지만 색은 감각적이다. 얇은 선이 작품으로 진입하기 위한 길이라면, 시각을 넘어 비가시적인 정서까지 전달하는 색감은 길 끝에서 만난 찬란한 세계다. 이 모든 여정으로 볼 때, 성시경의 작품은 낯설고 위험한, 그러나 아름다운 여행과도 같다.
여행자는 경로와 목적지를 계획한다. 그러나 여행이란 항상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예상 못 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목적지가 폐쇄되거나 날씨가 악화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들어간 공원에서 달콤한 휴식을 맛보기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다. 여행에는 우연과 계획이 공존한다. 성시경의 작품도 그렇다. “그간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즉흥과 계획 그 둘 사이에 완고한 장벽이 있는 것처럼 여겼고 한쪽을 선택하고 그에 걸맞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즉흥이 계획을, 계획이 즉흥을 서로 품고 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캔버스 위에서 즉흥과 계획이 혼재하고 이는 모두 감각적 체험으로 변모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얇은 선은 사각형, 원형 등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케 한다. 작가는 선과 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치해 규칙성을 형성하며, 일정한 패턴과 궤적을 통해 순수한 조형 언어를 탐구한다.
최근에 선보인 두 번째 개인전 ‘오랫동안, 갑자기’에서는 모듈형의 대형 벽화에서부터 가벼운 종이 작업에 이르는 다양한 회화적 양식을 실험했다. 이외에도 여러 그룹전을 가지며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작년에 열린 BB&M의 그룹전 ‘SUNROOM’에서는 건축적인 구조가 지닌 빛과 그림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였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더 과감해진 붓 터치와 드로잉이 한층 돋보이는 신작을 5점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