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2.13 13:15
빛으로 떠올리는 기억… 유리에 담아
“때때로 기억은 빛의 속도로 시간을 거스를 때가 있다”
작가 정명택과 2인전 ‘원형(原型)의 은유’ 신작 6점 선봬
2월 22일부터 3월 16일까지 아트조선스페이스




“왜 강화도인가요?” 작가 이규홍(52)을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나 물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입니다.” 그는 웃으며 명료하게 답했다. 유리의 물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하는 이규홍은 자연의 빛을 작품 주제로 삼는다. 작업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갯벌은 물때에 따라 들어찬 바닷물이 빛을 반사하기도,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 드러난 흙이 빛을 머금기도 한다며 이를 지켜보는 일이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강화도는 유리의 매끈한 표면과 거친 부재료의 질감 대비가 매력적인 그의 작품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빛이 잘 드는 이규홍의 작업실에는 다양한 형태와 색을 가진 유리가 많다. 고온의 가마에서 소성을 마쳐 부드러운 표면을 가진 작품 형태의 유리도 있지만, 원하는 크기로 만들기 위해 작가가 망치로 부숴 다양한 형태를 띤 유리도 있다. 2층 한쪽 벽에는 주황색 빛깔의 배경 위에 유리 조각을 붙인 작품이 걸려 있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다양한 각도로 빛났다. 작업실 한편에는 나무 창살이 가지런히 기대어져 있었다. 나무 창살을 어떻게 사용한다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형형색색의 유리를 붙여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옻칠, 금박, 나무 등 보조적인 재료를 이용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지만 유리와 빛을 사용한다는 점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이규홍에게 빛은 기억이다. 래미네이트 코팅한 유리판 위에 불규칙한 형태의 유리 조각이 놓여있다. 큰 유리 덩어리에서 깨져 나온 각각의 유리 조각은 유리판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끝없는 반사와 굴절을 만들어내며 작품에 공간감을 부여한다. 실제 과거에 쓰이던 나무 창살을 떼어와 스테인드글라스와 접목시킨 이번 신작 시리즈는 병풍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작가가 과거에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며 느꼈던 신성한 순간의 기억을 옛 물건인 병풍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감정, 기억, 물질에 대해 탐구한다.
이러한 이규홍의 작품을 전시 ‘원형(原型)의 은유(Archetypes: Not a Thing)’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2월 22일부터 3월 16일까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아트조선스페이스(ACS)에서 열린다. 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님께서는 오랜 시간 유리로 작업을 해오고 계십니다. 한 가지 소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오랜 시간 작업할 수 있게 한 유리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린 시절,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감상을 넘어 유리와 빛이 주는 조화로움에 경외심까지 들었습니다. 유리는 빛을 머금기도 하고, 투과하기도 하며 때로는 반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유리와 빛은 상호작용을 합니다. 이 오묘한 신비감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빛과 자연을 유리로 표현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빛은 과거에 대한 상징입니다. 저는 시간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흘러갑니다. 그런 탓에 우리를 비롯한 모든 만물은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식과 기억이었습니다. 때때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빛의 속도로 시간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그 찰나의 빛나는 순간을 담기 위해 빛을 현상학적으로 풀어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빛은 과거에 대한 상징입니다. 저는 시간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흘러갑니다. 그런 탓에 우리를 비롯한 모든 만물은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식과 기억이었습니다. 때때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빛의 속도로 시간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그 찰나의 빛나는 순간을 담기 위해 빛을 현상학적으로 풀어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매끈한 유리의 특성과 거친 부재료의 대비가 특히 강조되는 듯합니다.
작업 과정 중 유리주조 작업에서 어느 한 부분을 부드럽게 연마해 매끈한 부분을 만들어 내는데요. 이 작업에서 거친 부분과의 대비가 생겨납니다. 저는 나무, 돌, 흙 같은 자연의 물성 그대로 자연스러운 질감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작가님은 그동안 다듬잇돌이나 맷돌 같은 한국 전통적 소재를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셨는데요. 이러한 옛 물건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한국 전통보다는 저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유래됐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았던 집과, 그 집에 있던 오브제들, 그리고 여러 기억을 더듬어가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에게 영향을 줬던 모든 요소를 표현했습니다. 보통 오래된 물건에는 그 안에 깃든 이야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 잊힌 과거의 물건을 다시 조명한다면 그걸 통해 다른 사람과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과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한국 전통보다는 저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유래됐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았던 집과, 그 집에 있던 오브제들, 그리고 여러 기억을 더듬어가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에게 영향을 줬던 모든 요소를 표현했습니다. 보통 오래된 물건에는 그 안에 깃든 이야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 잊힌 과거의 물건을 다시 조명한다면 그걸 통해 다른 사람과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과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작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 파이널리스트로 이름을 올리셨죠. 이후 뉴욕 노구치 미술관에서 후보작 전시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 뜻깊게 느껴집니다. 출품작 역시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옛 물건인 맷돌을 닮았네요. 현지 반응은 어땠나요?
유리 주조에 옻칠을 적용한 사례가 드물어서 주목을 받은 듯합니다. 저의 작품은 두껍고 커다란 보석 호박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작품 제작 시 호박색 유리 덩어리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투명한 유리 위에 호박색 칠을 해 가마 소성 과정을 거쳤습니다. 감사하게도 현지에서는 이 점을 관심 있게 본 것 같습니다.
─특히 옻칠은 작업 과정이 까다롭고, 유리 역시 뜨겁고 민감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럼에도 두 기법을 결합해 작품을 선보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기억을 형상화하기에 유리는 적합한 소재입니다. 유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본연의 성질을 유지하거든요. 옻칠 역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기법이고요. 따라서 기억을 현실의 오브제로 구체화하기 위해 투명한 유리 위에 깊이감과 시간성을 부여하고자 옻칠을 입히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패스트 산업이 널리 퍼진 현재, 오히려 천천히 공들인 공예 작품이 더 주목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님이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저 역시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전달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현재는 디지털 문화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무엇이든 디지털 세상 속에서는 가능한 듯합니다. 공예까지도 완벽하고 간편하게 누릴 수 있죠. 그러나 저는 공예 작품이 가진 오랜 제작 시간과 손맛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깊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통해 시각적 치유와 위로를 건넬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요. 제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 부분을 느꼈으면 좋겠고, 저 또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작가님은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릴 ‘원형(原型)의 은유’ 전시에 참여하시는데요, 한국 전통을 담아 작업하는 정명택 작가와 함께하는 2인전이죠.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질 텐데, 이에 대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정명택 작가와 함께 전시에 참여하게 돼 기쁩니다. 정명택 작가는 저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룹니다. 또 나무의 사용이나, 소재의 측면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지점이 많이 있어서 함께하는 이번 전시가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내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한국 전통 소재인 병풍으로 신작을 선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 병풍이 유리로 표현된다니 낯설고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번 출품작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번 출품작은 빛에 대한 경외를 담은 작품 시리즈와 빛을 머금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병풍의 형식으로 설치하는 시리즈 두 가지를 선보입니다. 사뭇 다른 형식을 띠고 있지만 유리와 빛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풍 작품은 건축물에 사용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어느 공간에서나 연출할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하게 제작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공간에 빛의 향연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출품작은 빛에 대한 경외를 담은 작품 시리즈와 빛을 머금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병풍의 형식으로 설치하는 시리즈 두 가지를 선보입니다. 사뭇 다른 형식을 띠고 있지만 유리와 빛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풍 작품은 건축물에 사용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어느 공간에서나 연출할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하게 제작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공간에 빛의 향연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