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1.19 19:00
켄건민·유귀미·현남·임미애 4인전 ‘원더랜드’
2월 24일까지 리만머핀 서울


물어뜯긴 몸에서 피가 낭자해도, 배가 갈라져 내장이 터져 나와도, 켄건민(Ken Gun Min·48)의 화면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은 그저 환상적이고 화려하며 아름답게 빛난다. 다채로운 원색의 팔레트와 자수로, 비즈로 알알이 빚어지고 꿰어진 잔혹한 판타지 풍경이 동화적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제단화를 연상하는 듯한 ‘1922 Western Avenue’(2023)에서는 상반되는 두 세상이 공존하는데, 두 패널로 이뤄진 회화에서 상단은 볕이 내리쬐는 고요한 수면을 그렸다면, 아래 캔버스 속에서는 물고기, 게, 문어, 가재 등이 서로 엉켜 먹고 먹히는 혼돈의 전란 중이다. 그 와중에 이들의 찢긴 피와 살은 형형색색의 구슬과 섬세한 자수로 엮어 이질성을 배가한다.
이 장면은 1992년 발생한 LA 폭동 때 한인 사회가 겪었던 차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당시 경찰이 백인이 거주하는 주택가로 가는 길목은 막았으나, 코리아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막지 않아 한인 사회가 폭도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다. 작가는 이민자로서 겪은 소외감과 불평등을 그때의 사건에 빌어 화면에 소환한 것. 특히 작가는 최근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서 경찰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을 둘러싼 채 일반 시민들과 차단하는 모습에서 그때의 폭동이 다시 떠올랐다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취리히, 베를린, 로스앤젤레스에서 작업 활동을 이어온 켄건민은 이민자로서의 경험과 다문화적 관점을 자양분 삼아 수면 아래 간과되고 소외된 주제에 천착해 왔다.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은 역사적 내러티브를 성경이나 고대 신화 이미지와 결합하고 유화를 한국 전통 안료와 자수와 섞어 교차 문화적 풍경을 화면 위에 ‘직조’한다.
다양한 매체와 소재, 작업 방식은 그가 전업 작가가 되기 전, 텍스처 디자이너로 일하거나, 영화제작사에서 근무한 경험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내러티브적인 그의 회화에서 연극 무대를 떠올리는 극적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자수로써 실과 실이 직조되며 이면의 이야기들과 역사가 탄탄하고 견고하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켄건민의 그림이 리만머핀 서울에 내걸렸다.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한국계 작가 켄건민·유귀미·현남·임미애 4인 그룹전 ‘원더랜드(Wonderland)’가 2월 24일까지 열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안한 이번 전시는 다양한 연령, 성별, 지역에서 고유의 방식으로 동시대적 가상 풍경을 직조해 온 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유귀미는 과거 기억 속 일상 공간을 그린다. 그는 추억이 담긴 공간을 주요 소재 삼아 화면에 옮기는데, 이는 초현실주의 작가와 아들의 그림책에서 영감을 얻은 특유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색감을 통해 꿈같은 풍경으로 변환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얼굴이 가려진 인물은 신비로운 공간의 안내자 역할을 하며 개인적 의미를 초월하는 보편적 공간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현남은 조각을 통해 동시대 도시 풍경과 가상공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제시한다. 그의 예술적 실천을 관통하는 방법론은 광대한 자연경을 하나의 사물로 구현하는 축경(縮景)으로 대표된다. 작가에게 있어 현대의 축경은 폴리스티렌, 에폭시, 시멘트 등의 산업 재료를 통해 조성된다. 대표적으로 작가가 ‘채굴’이라 일컫는 작업 방식은 폴리스티렌 덩어리에 ‘굴’을 파고, 구멍에 다른 재료를 넣어 굳힌 뒤, 열을 가해 폴리스티렌을 제거하는 일련의 네거티브 캐스팅 과정을 거친다. 재료의 화학 반응으로 형성된 결과물은 거친 표면과 선명한 색상, 수직성이 강조된 비정형의 조각으로, 종말론적 미래의 도시 풍경과 폐허를 은유한다.

임미애의 화면에서 다채롭게 움직이는 중층적이고 파편화된 형상은 의인화된 생명체나 증식하는 유기체 돌연변이를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작가의 유년기 기억과 환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감정적, 공간적 기억을 발견하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와 같은데, 파편화된 움직임은 십대에 한국에서 하와이로 이민한 뒤 지속적으로 거처를 옮겼던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에서 기인했다.
독특한 시각 언어로 동시대성을 이야기하는 작품들 간에 발생하는 비언어적 충돌에 주목하는 이번 전시는 과거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한 이들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포괄한다. 켄건민·유귀미·현남·임미애 4인이 공유하는 원색의 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