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빚어내는 두 작가, 김택상과 헬렌 파시지안

입력 : 2023.02.10 17:38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3월 11일까지 리만머핀 서울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윤다함 기자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윤다함 기자
김택상, Resonance-23-3, 2023, Water, acrylic on canvas, 176x183cm. /윤다함 기자
김택상, Resonance-23-3, 2023, Water, acrylic on canvas, 176x183cm. /윤다함 기자
 
“애초에 저는 무언가를 정해놓고 살아오지 않았어요. 순간순간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왔습니다. 작업이란 삶의 문입니다. 작가의 삶을 알아야 그의 작품 또한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죠. 제 작업을 그러한 측면에서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작가 스스로도 작업의 다음 단계를 알 수 없다. 그저 매 순간의 결정에 따라 화면은 완성돼 나갈 뿐이다. 김택상(65)은 이러한 우연성과 자유로움이 가장 큰 동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캔버스 표면에 색을 겹겹이 칠해나가는 서구의 회화 실현 방식에서 탈피해 캔버스 그 자체의 자연색이자 숨 쉬듯 살아 있는 듯한 빛을 화면에 담아왔다.
 
독창적인 방법론의 동인(動因)은 ‘물빛’이었다. 물을 머금은 빛의 색을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수없는 모색과 실험 끝에 본디 무색인 물로써 빛을 산란시키는 물빛을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층층이 얇게 입힌 물감이 마르면서 천 표면이 수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고 미세한 가루 입자 간에는 극미한 공간이 생성되는데, 그 사이사이로 새든 빛이 산란하면서 화면 밖으로 스며 나와 발광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는 캔버스 표면이 ‘빛이 숨 쉬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같은 과정을 수십, 수백 번 거듭한다. 작가는 작업에 관여하면서도 캔버스 위에서 자연의 작용 과정이 이끄는 여러 가능성도 함께 열어둔다. 김택상의 보다 깊어진 표현력과 다채로워진 조형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김택상과 헬렌 파시지안(Helen Pashgian·89) 두 작가가 함께하는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가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다. 두 작가는 빛과 공간을 소재로 삼아 각기 다른 매체를 바탕으로 고유의 작업 세계를 펼쳐온 이들로, 자연적 속성, 근원적 공간, 시간 속 찰나 등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지닌다.
 
레진을 주재료로 해 단단한 형태 속에 빛을 가두는 법을 연구해온 파시지안의 작업은 사방으로 움직이며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데, 모호하고도 일순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빛, 그 빛을 가둔 작품을 바라보는 일시적인 경험은 작가의 작업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미니멀리즘의 하위 예술 운동으로 발전한 빛과 공간 운동(Light and Space Movement)의 선구자다. 대기와 천상의 요소가 지닌 미학과 인식의 관계를 탐구하며, 에폭시, 플라스틱, 레진 등의 산업 재료를 혁신적으로 응용했다고 평가받는다. 파시지안의 작품의 반투명한 표면이 빛을 여과하는 동시에 머금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헬렌 파시지안, Untitled, 2019, Cast epoxy with resin, 15.2cm. /리만머핀
헬렌 파시지안, Untitled, 2019, Cast epoxy with resin, 15.2cm. /리만머핀
헬렌 파시지안, Untitled, circa 2010, Cast epoxy, 30.5x30.5x5.1cm. /리만머핀
헬렌 파시지안, Untitled, circa 2010, Cast epoxy, 30.5x30.5x5.1cm. /리만머핀
 
이번 전시에는 파시지안의 대표작인 구(球) 작업을 포함해 캐스트 에폭시로 제작한 벽면 설치 작업도 내걸린다. 희미하게 새어 나온 빛 혹은 반사된 카메라 플래시가 연상되는 각 작품 속 형상은 나머지 어두운 반사면과의 대비로 뚜렷하게 빛난다. 빛이 물에 입사할 때 나타나는 시각적 효과에 대한 파시지안의 지각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빛과 물이 닿는 공간 속 지점과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표현했다.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윤다함 기자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윤다함 기자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김택상·헬렌 파시지안 2인전 ‘Reflections and Refractions’ 전경. /리만머핀
 
파시지안이 레진 등 재료의 물성을 활용해 빛을 실제 공간 속으로 불러내었다면, 김택상은 흡사 눈앞에 일렁이는 듯한 빛을 평면으로써 시각화한다. 이번 전시장에 내걸린 김택상의 신작을 마주하면 그의 기존 작업을 봐왔던 이들은 작가가 지난 몇 년 사이 많은 변화를 관통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화면은 이전보다도 더욱 다채로운 빛깔과 층위로 한층 풍부해졌는데, 이는 환경적 전환에서 기인했다. 지난 2020년 청주대 교수직을 그만두며 수십 년 서 왔던 교단에서 내려와 온전히 창작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에게 일어난 주요한 변화다. 작업에 대한 집중력과 집중도가 높아짐은 물론, 교수직을 내려놓고 전업 작가 김택상으로서의 자유분방함과 표현력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된 배경이다. 
 
파시지안과 김택상은 회절, 굴절, 산란과 같은 빛의 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공간적 오브제와 환경으로 변환하는 고유한 능력을 제시해온 미술가들이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빛으로써 전시 공간을 상호 소통적인 시적 경험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두 작가가 선사하는 각기 다른 빛으로 흠뻑 물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3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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