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2.07 17:39
‘생동하는 에너지’ 가득한 지난 40년 화업 소개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자유낙하’展
3월 12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신체와 여성성을 소재로 다룬 작업으로써 동시대 미술의 주요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키키 스미스(Kiki Smith)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체 장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미술계에 강인한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가정폭력, 임신중절, 에이즈 등 신체를 둘러싼 1980년대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과감히 다뤘다. 1990년대에 이르러 스미스는 인물의 전신상을 제작하는데, 배설, 생리 등 파격적인 형상의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기존의 조각과는 거리를 두며 독창적인 개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알 수 없는 낙서와 같은 형상을 한 ‘무제(머리카락)’(1990)는 일견 추상화처럼 보이나 작가의 자화상이다. 실제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그림의 모서리에 찍혀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고무로 자기 머리와 목을 본뜬 캐스트를 만들고 여기에 잉크를 묻혀 석판에 찍어냈으며 머리카락은 흩뜨려 복사기로 인쇄해 석판 위에 전사했다고 한다. 정사각형의 종이 대부분은 스미스의 머리카락이 한 폭의 추상화에 가깝게 가득 채우고 있다.
1998년에 제작된 ‘소화계’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혀부터 항문에 이르는 장관 전체를 주철로 제작한 작업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물이나 감옥을 떠올렸는데, 전시장 벽에 설치된 모습을 마주한 뒤부터는 작품이 라디에이터와 닮았다고 느꼈다고 한다. 형태의 유사성 이외에도 실내 곳곳으로 열을 방출하는 라디에이터의 기능이 마치 에너지를 흡수해 신체 곳곳으로 영양을 배분하는 소화계의 역할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라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스미스는 과격하고 도발적이던 이전 시기의 작품과는 달리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업을 추구한다. 다양한 배경의 종교, 신화, 문학에서 이미지를 취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직조하는가 하면, 인간을 넘어 동물과 자연, 우주 등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소재로 삼으면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조각뿐만 아니라 설치, 판화, 드로잉,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의 아시아 첫 미술관 전시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가 3월 12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펼쳐진다.
다양한 매체를 탐구하는 제작가의 면모 그리고 시대의 굴곡을 따라 조형적 운율을 달리해 온 작가의 예술적 특성을 ‘자유낙하’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자리다. 이번 전시명은 그의 동명의 작품 타이틀에서 비롯되는데, 그의 작품에 내재한 분출하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함의하고 있다. 판화이자 아티스트북 형식으로 제작된 ‘자유낙하’(1994)는 평면 매체에 입체적으로 접근한 스미스의 조각가적 면모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대표작으로, 이번 전시에도 내걸린다.
섬세하게 조율된 스미스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 판화, 사진, 태피스트리, 아티스트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작품 140여 점이 소개된다. 그의 대표작과 함께 독일의 영상 제작자 클라우디아 뮐러가 키키 스미스의 일상과 작업 현장을 담은 약 52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영상, 여성 주인공 중심의 판화 14점으로 구성된 블루 프린트 시리즈 그리고 2022년 제작된 최신작까지 함께 공개된다.


전시의 세부 구성은 연대순 나열이나, 여성, 신체와 같이 작가를 수식해 온 기존의 규정적 접근에 기반하기보다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핵심적으로 발견되는 서사구조, 반복적 요소, 에너지 같은 몇몇 구조적 특성에 기초해 꾸려진다. 특히 전시 공간은 일방향적 구조가 아닌 곡선형의 순환적 구조로 이뤄진다. 이러한 구조는 작가가 본인의 예술 활동을 두고 ‘정원을 거니는 것과 같다’라고 일컬었던 것에 모티프를 얻어 스미스가 지난 화업에서 강조해 온 상하좌우로 생동하는 배회의 움직임을 상징한다니,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운 동선을 따라 관람하길 추천한다.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