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1.18 09:00
경기 광명 복합단지 유플래닛 전체가 ‘전시장’으로…
기존 건축물 미술품 수준 뛰어넘는 규모와 예술성
김치앤칩스, 바래, 정성윤, 그라플렉스 등 동시대 작가 24팀 참여

연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 예산의 1% 이하 금액을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하도록 하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본래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해 예술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도시환경에 문화적 이미지를 불어넣는다는 취지로 시작됐으나, 공공미술품으로써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아 온 지 오래다. 건물을 다 지어놓고 끝에서야 건축물 준공 허가만을 위한, 예술품이 맞는지조차 의구심이 드는 설치물을 세워놓기 일쑤였기 때문. 또한 일부 작가에게만 의뢰가 편중돼 특색 없이 비슷한 형상이 여기저기 난무하는데다가 지속적인 관리가 되지 않아 흉물로 전락하기 부지기수였다.

디자인을 강조해온 주거 브랜드 ‘데시앙’으로 잘 알려진 태영건설에서 경기 광명에 주거, 오피스, 호텔, 백화점, 공연장, 미디어 시설로 구성된 미디어&아트 밸리 ‘유플래닛’을 건립하고 해당 단지 전체를 하나의 전시장으로 접근해 곳곳에 공공미술품을 설치했다. 그간 울며 겨자 먹기로 설치돼 온 정체불명의 설치물이 아닌, 제도명과 그 의도에 걸맞은 ‘진짜’ 미술품을 세운 것으로, 건물 이용자와 주변을 오가는 시민 모두 즐길 수 있는 공공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적 책무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흥선 태영건설 디자인팀 선임과 한종윤 태영건설 마케팅팀 팀장에게 해당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한 지난 3년에 관해 물었다.

─경기 광명에 주거, 오피스, 호텔, 백화점, 공연장, 미디어 시설로 구성된 미디어&아트 밸리 ‘유플래닛’을 세우고 해당 단지 전체를 하나의 전시장으로 접근해 건축물 미술품과 미디어 아트를 곳곳에 설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를 기획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흥선 선임(이하 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콘셉트로, 미디어와 아트의 일상화를 최고 경영진도 늘 강조한다. 이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애초에 ‘미디어&아트 밸리’란 주제 하에 유플래닛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 명명은 했으나 건물을 완공해가면서 이를 어떻게 캐릭터화하고 구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이 들었다. 제도에 의해 공공미술품은 꼭 설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해 아예 야외에 미술관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기성 공공미술품과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이들 작품이 일관된 주제 아래 한데 모여 하나의 ‘전시’로서 기능해야 했기 때문에 홍보라 팀팩토리 아트디렉터를 섭외해 공공미술 전시를 기획했고, 미디어아트 전시는 양찬제 상업화랑 대표가 도맡았다.
한종윤 팀장(이하 한): 디렉터 선정을 위해 최고 경영진이 소개해준 국내 메이저 화랑의 자문을 구해 추천받은 다수의 전문가와 미팅을 거듭했으나 공공미술이 기성 미술 영역에서 좀 소외되고 배제된 면이 있어서인지 다들 고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끝에 홍보라 예술감독을 만났는데, 우리가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누구보다도 이해도가 높고 잘 파악하고 있더라. 그가 예술행정을 공부했고 공공미술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권위자 중 하나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 태영건설이 한 일은 작품이 적절한 위치에 잘 설치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의하는 거였다.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 전시를 기획한 것은 디렉터들의 몫이었다. 태영건설과 이들 디렉터, 또 작가들 간의 신뢰가 있었기에 지난 3년의 과정을 무탈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오늘의 날씨’ ‘유플래닛으로의 여행’ ‘벽화 프로젝트’ 총 3개의 전시가 함께 동시 개최되는 형태다. 각 전시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미디어&아트 밸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15팀 작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전 ‘오늘의 날씨’는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날씨뿐 아니라, 자연의 원리 안에서 변화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보여준다. 재료와 표현 기법이 유연한 작가 선정에 중점을 두고 커미션 작가 8팀을 선정하고 작품을 구상했다. 이후 커미션 작가의 작품과 공간 사이에 연결점을 만들 수 있는 작품을 국제 지정 공모를 통해 나머지 7팀 선정했다. 각각의 작품은 세계의 신기술, 신소재, 친환경 공법 등을 활용했고 도시 구성원을 연결하고 공동의 경험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아울러, 미디어&아트 밸리를 표방하는 유플래닛의 특성과 연계해,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8팀의 작품도 흥미롭다. 특히 수묵 애니메이션, 수채화 애니메이션, 사진 영상 등 순수 미술과 미디어 기술이 결합한 작품들이 출품됐다. 첨단 기술로 만들어지는 미디어 아트일지라도 작가의 손끝과 인간의 순수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게다가, 일상과 자연, 유플래닛과 현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기에, 이러한 작품의 유래도 방문객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115미터의 대형 작품이 이어지는 벽화 프로젝트는 상업시설에 설치된 그라플렉스(GRAFFLEX)의 신작이다. 그라플렉스는 그래픽 아트를 기반으로 일러스트, 회화, 설치, 아트 토이 등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다가가기 쉽게 표현하는 아티스트로 대중에게도 인지도가 높다. 유플래닛의 행성 아이콘과 그라플렉스의 스마일 이미지를 중심으로 행복의 바람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벽과 바닥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 영상도 설치되었기 때문에 향후 인기 포토존으로 등극할 것 같다.

─단지 규모가 크기도 크지만, 이번 작품들을 들이는 데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거라 짐작된다. 실제 예산 규모는.
한: 처음 계획했던 예산으로는 다 구입할 수 없을 귀한 작품을 디렉터들과 작가들의 도움으로 설치할 수 있었다. 의무적인 것만 따지면 원래는 18억원 내외만 썼으면 됐으나, 공공미술품만 20억, 벽화는 4억, 미디어는 8억 정도 들었으니 의무 비용에서 훨씬 벗어난 액수가 들었다. 그러나 금액을 떠나서 이러한 아트 마케팅을 통해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프라임타임에 TV 광고 한 번 내보내거나 CSR 활동 홍보하는 것보다 오히려 마케팅 효과가 훨씬 더 좋다고 판단한 거다.
─지난 3년에 걸쳐 진행돼 왔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이: 빨리 시작한다고 시작한 건데도 이제 돌이켜보니 상당히 늦은 시점이었다. 3년 전이라고 해도 그때는 이미 분양과 인허가가 끝나고 시설도 들어간 상황이라, 작품 위치나 설치를 위해서는 작가의 의견이나 작품보다도 분양자의 의견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로젝트의 취지가 취지였던 만큼 단지 내에 지역예술가를 후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앞서 말했듯이 애초에 분양상품으로 나온 거라 모두 판매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러한 사항을 먼저 고려했어야 했지만 미처 소외됐던 부분이다. 한번 해보니 이제 감이 좀 잡혔다. 만약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어도 분양 전부터 착수해야 수월하게 진행할 것 같다.

법규적, 행정적 과정에서도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에 맞닥뜨렸다. 미술품이 준공 전 설치가 돼야만 준공 허가가 떨어지는데, 미술품 설치를 위해서는 작품 심의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 심의 과정을 통과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처음 15개 작품을 냈을 때 13개 탈락하고 겨우 2개만 통과했다. 작품의 의도 등을 발표할 기회가 따로 없어 오로지 서류로만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무지 어렵더라. 그런데 문제는 이미 작가와는 계약이 다 끝난 상황인데,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과정이 순차적으로 어그러지게 된다.
또한, 심의에는 작가의 작품 구상도 등을 제출해야 하는데, 작가는 실제 작품 제작만을 앞둔 상태로, 만약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손해는 작가들이 고스란히 입게 된다. 심의에서 부결됐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를 구상하고 기획한 것 대한 처우와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품 설치를 하지 않고 그 대신 작품 설치비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문예진흥기금으로 출연할 수도 있긴 하다. 심의에서 자꾸 부결을 받다 보니 도저히 안 되면 문예진흥기금으로라도 출연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솔직히 건설사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심의 통과하느니 문예진흥기금으로 들어가면 속편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작가가 아니겠나. 적어도 심의가 통과하지 못한 작품만이라도 문예진흥기금으로 내게끔 해주는 식의 대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플래닛 단지 내 곳곳에 공예, 미디어, 설치, 조각 등 다채로운 작품이 놓여있는데, 관전 포인트를 짚어준다면.
한: 눈으로만 관람하는 것이 아닌, 직접 만지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게 공공미술의 매력인 것 같다. 이를테면, 가구 작업을 주로 이어온 이상혁 작가는 이용자가 직접 눕고 앉을 수 있는 가구 작품을 하고 싶어 했으나 심의 과정에서 수정돼 사람이 올라탈 수 없도록 각도를 수정했다. 그렇게 조정을 거쳤으나 여전히 이용자들이 앉거나 올라가더라. 작가의 본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방문객을 위해 11월 주말마다 도슨트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일 2회 1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향후 연장 운영할 계획도 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대중이 알아주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설명해 방문객이 작품을 십분 즐길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이: 그렇다. 공공미술품이란 덩그러니 홀로 작동될 순 없다. 조경과 건축이 어우러져 합작을 이뤄낼 수 있다. 미술품은 건축물을 더욱 가치롭게 만들어주며 이로써 작품 역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서로 시너지를 내는 공생 관계다. 작품과 유플래닛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공공미술이라고 하면 지금껏 조각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는데, 유플래닛에는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 설치, 공예 등 다채로운 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예술성을 선도적으로 제시한 사례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 사회적 책임이란 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다. 건물을 지을 때 건축물 미술품은 어차피 들여놔야 하는데, 기본에서 조금만 더 힘을 보탠다면 보다 훨씬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공간을 만드는 회사다. 공간 이용자에게 어떠한 가치를 줄 수 있느냐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한 여러 접근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잘 알려진 대로 태영그룹 최고 경영진이 미술애호가이자 컬렉터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미술품으로써 그 답을 구하고자 했다.

점차 미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대중성도 커지고 있지 않나. 공공미술도 그 흐름에 있다고 본다. 지난 9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 전시됐던 <헤일로>로 잘 알려진 김치앤칩스의 새로운 작품이 단지 내 브릿지에 설치됐다. <옵티컬 레일(Optical Rail)>은 투명한 아크릴 렌즈 세트가 모터 시스템에 의해 패턴 이미지 위를 좌우로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입체적인 작품이다. 이와 같은 키네틱 작업은 그간 공공미술품으로는 보기 어려웠을 거다. 건설사는 이처럼 대중의 눈높이와 니즈에 맞는 수준 높은 공공미술품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환원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다음 행보가 궁금한데.
한: 첫 기획부터 건물 올리는 데 총 15년이 걸렸다. 그만큼 애착도 크고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총력을 기울였다. 이 정도 규모의 다음 개발은 2024년이다. 그때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길 바란다. 우리도 처음 시도한 거라 후에 다들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좋은 선례로 회자될지, 아니면 돈만 낭비한 사업으로 평가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