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1.04 17:54
[조은혜 페레스프로젝트 아시아 디렉터]
애드 미놀리티, 도나 후앙카 등 젠더 표현적 작가들 소개
아트부산 이어 키아프에서도 ‘완판’ 행렬
내년 서울에 아시아 최초 전시 공간 오픈

‘코시국’ 이후 열리는 국내 최대 아트페어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 ‘키아프(KIAF)’가 역대 최다 매상고와 함께 지난 10월 막을 내렸다. 해외 메이저 갤러리들 다수가 참가한 가운데, 신선하고 도전적인 작품으로 아트러버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페레스프로젝트(Peres Projects)’는 지난 3년 연속 아트부산에 출전해 완판 행렬을 이어오며 국내 미술계에 명료한 존재감을 각인한 베를린의 현대미술 갤러리다.
내년 초에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다 전시 공간을 차릴 예정이다. 조은혜 페레스프로젝트 아시아 디렉터를 만나 그간 페레스프로젝트가 소개해온 과감하고도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지닌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올해 키아프에 처음 참가했다. 완판에 예약이 폭주했다고 들었다.
“아트페어 시작 전, 먼저 열린 온라인 뷰잉룸에서 선판매는 물론 문의가 빗발치는 것을 보고 국내 미술시장의 열기가 상당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온라인으로 먼저 접한 뒤, 행사장에서 직접 실물로 작품을 보고 바로 실제 구매까지 이어진 경우도 다수였다. 우리 작가들 대부분이 신진이고 다소 생소할 수 있는데, 이처럼 작가들에 대한 정보가 좀 부족한 상황일지라도 이들의 작품이 시각적으로 충분히 경쟁력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 젊은 작가들 작품이라 개성 강하고 독특한 스타일에다가 가격대도 매력적인 덕분에 새로이 유입된 신규 컬렉터들이 많았던 것도 이번 키아프에서의 수확 중 하나다.

그간 국내 아트페어로는 유일하게 아트부산에만 출전해오면서 서울에 있는 기존 컬렉터와 교류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는데, 이번 키아프를 통해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는 개인적인 기쁨도 간간이 있었다. 키아프에 처음 참가하는 만큼 하비에르 페레스(Javier Peres) 대표도 꼭 자리하고 싶어 했지만, 같은 기간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때문에 서울에 오지 못했다.”

─행사 중 관람객의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작가는.
“지난 2년간 페레스프로젝트가 한국 미술시장에 꾸준히 소개해온 도나 후앙카(Donna Huanca)가 이번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후앙카의 회화는 퍼포먼스에서 기인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칠된 모델의 몸을 소재로 삼아 그들의 움직임과 흔적을 화면에 담는다. 모델들은 주로 여성으로 이는 여성이 결정권을 갖고 주도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의 작업은 뉴욕 구겐하임 컬렉션, 마이애미 루벨 패밀리 컬렉션, 상해 유즈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 소장돼 이미 작품성과 예술성을 검증받은 1980년생 작가다. 얼마 전에는 로스앤젤레스 마르시아노 미술관(Marciano Art Foundation), 코펜하겐 현대미술관(Copenhagen Contemporary)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스페인 빌바오 미술관(Museo de Bellas Artes de Bilbao)에서는 그룹전에도 참가했다.
특히 최근에는 루이비통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해 그의 회화 <Cara de Fuego>와 <Muyal Jol>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한정판 가방이 출시되는 등 미술계 밖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키아프에 들고나온 출품작 모두 대작이었지만 바로 새 주인을 찾아갔다. 지난 5월 아트부산에도 2미터가 넘는 후앙카의 대작을 들고 나갔는데 개인 컬렉터에게 소장됐었다.”


─한국에서 페레스프로젝트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애드 미놀리티(Ad Minoliti), 도나 후앙카의 공이 컸다. 이들처럼 젠더 표현적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들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페레스프로젝트가 밀고 있는 또 다른 작가들이 있다면.
“이번 키아프에서 부스의 노란색 외벽에 걸린 컬러풀한 초상화들이 마뉴엘 솔라노(Manuel Solano)의 작품이었다. 트렌스젠더이자 맹인이란 독특한 바이오그래피뿐만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 등을 주제로 한 자전적인 작업으로 아트씬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작가는 2013년 HIV 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는데, 이후에도 회화, 비디오, 설치미술 등의 다양한 작업을 활발히 이어오며 자신의 독창적인 작업방식을 고안해냈다. 캔버스 표면에다가 작은 핀을 꽂아 아웃라인을 잡고 이를 따라 쉽게 구부려지는 끈, 테이프 등을 연결해 촉각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이 형상에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붓이 아닌, 손가락을 이용하는 데에는 시각장애인이 촉각으로써 세상을 읽고 바라보듯이 솔라노도 손가락으로 작품 속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또 다른 출품작 <Rugrats>(2021)는 동명의 인기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를 화면에 옮긴 것인데, 작가는 어릴 적, 이 만화를 보며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작품에서 왼쪽은 주인공 앤젤리카, 오른쪽은 앤젤리카의 엄마인 샬롯으로, 만화에서 엄격하지만 자상한 엄마로 그려진 샬롯을 보며 솔라노는 강인한 여성상을 꿈꿨다고 한다.

곧 파리 팔레드 도쿄와 페로탕 뉴욕에서의 그룹전을 앞두고 있는 리처드 케네디(Richard Kennedy)의 과감한 붓터치가 특징인 회화도 추천하고 싶다. 이미 국내 미술애호가들에겐 낯익을 수 있을 만큼 그의 작업은 한번 보면 강렬하게 잔상이 남는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등을 통해 미국의 흑인 성소수자의 삶을 투영한다.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미술은 물론 작곡, 오페라 등 현대 예술의 다채로운 장르를 아우르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오너 하비에르 페레스 대표가 작가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페레스프로젝트는 이미 떠버린 작가에는 관심 없다. 시장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히든 잼(hidden gem)’과 같은 작가들을 찾아내어 이들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작가와의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에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일례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화면의 직조 작업으로 유명한 브렌트 웨든(Brent Wadden)은 본래 페레스프로젝트에서 근무하며 작가 생활을 병행했었다. 이때 페레스 대표의 눈에 띄어 2013년 우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후 다음 해부터 알민 레쉬, 페이스 등에서 연달아 개인전을 열며 메이저 미술계로 급부상하게 됐다. 이처럼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마음껏 펼쳐내 보일 수 있도록 원조하고자 한다.
소속 작가들의 출신은 미국, 브라질, 멕시코, 영국 등 다양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현재 베를린에서 생활하며 작업하고 있는데, 이는 페레스 대표가 작가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다. 페레스프로젝트가 위치해 있는 베를린에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마련해줌으로써 자주 교류하고 물심양면 지원하기 위함이다. 또한 작가의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작가와 갤러리는 파트너 관계로서, 서로 신의를 바탕으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결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페레스 대표는 원래는 변호사였는데, 미술품만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매료돼 하루아침에 변호사를 그만두고 페레스프로젝트를 열게 됐다. 본래 그렇게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바로 일을 추진할 만큼 결단력이 좋더라. 물론, 어릴 때부터 미술과 친숙한 환경에서 생활한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조부모가 컬렉터였고, 본인은 아프리칸 아트에 심취해 모마(MoMA)에 작품을 기증할 만큼 조예 깊은 컬렉터이기도 하다.”

─내년 서울에 아시아 최초로 전시 공간을 오픈하는데, 어떠한 곳일지 기대가 크다.
“내년 초쯤 서울 강북 모처에 개관될 예정이다. 해당 공간에서는 1년에 3~4번 정도의 기획전을 비롯해 그 외 기간에는 프라이빗 뷰잉룸으로 운영될 계획이다. 전시를 더 자주 열고 싶어도 바젤, 프리즈, 피악 등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대로 작품이 판매돼 전시장에 걸 작품이 부족할 지경이다.
서울에 공간을 여는 것은 한국 컬렉터들과 더욱 수월하게 소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국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에도 목적이 있다. 아직 모든 것이 미정이지만, 페레스프로젝트가 그간 회화를 위주로 선보여 왔기 때문에 회화 작가 중심으로 물색에 나설 것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