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10.30 05:16
서울 한남동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일찍이 먼저 둥지를 틀고 오늘의 한남동이 새로운 ‘갤러리 디스트릭트(gallery district)’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선도한 삼성 리움미술관은 오랜 겨울잠을 끝내고 최근 다시 문을 열었고,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 중 한 곳인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은 아시아 최초의 전시장을 한남동에다 차렸다. 또한 철강, 금융 등 타종 기업에서도 갤러리 사업에 나서며 자본력을 앞세운 대규모 공간을 차린 곳 또한 한남동이다.
역사 깊은 전통적인 갤러리 거리인 삼청동과는 구별되는 한남동은 출신도, 성격도 제각기 다른 화랑들이 모여 보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의 아트씬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운치 있는 건축물과 개성 강한 전시 공간이 어우러지며 너 나 할 것 없이 미술 애호가를 매혹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사립미술관은 물론, 세계적인 메가 갤러리부터 신생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한남동의 아트 지형도를 완성하고 있는 이들을 소개한다.

◆불꽃처럼 밝고 뜨거운 작가를 모아서… ‘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
독서당로 길가에 자리 잡은 검은 외관의 공간이 눈에 띈다. 에드 루샤(Ed Ruscha)의 대표 사진집 ‘다양한 작은 불꽃들과 우유 (Various Small Fires and Milk)’(1964)에서 이름을 따온 로스앤젤레스 갤러리 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Various Small Fires, VSF)는 2019년 한국에 진출했다. 이후 빌리 알 벵스턴(Billy Al Bengston), 조슈아 네이선슨(Joshua Nathanson), 지나 비버스(Gina Beavers) 등 국내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해외 작가들을 소개하며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다져오고 있다.


오는 11월 6일까지는 레즐리 사르(Lezley Saar)의 아시아 첫 개인전 ‘검은 정원’을 선보인다. 사르의 작품은 초현실적인 천체 회화, 콜라주, 태피스트리를 통해 혼혈 정체성과 젠더, 섹슈얼리티 어감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탈출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 고딕 양식 감성으로써 과거를 말하지만, 초현실주의 이미지와 상징주의의 결합은 우리의 미묘한 미래 혹은 완전히 다른 현실로 안내하는 듯하다.


◆자산운용사가 운영하는 갤러리는 어떨까… ‘파이프갤러리’
파이프갤러리는 두나미스자산운용의 신사업 일환으로 지난 9월 문을 연 신생 갤러리다. 김미나 파이프갤러리 이사는 “예술성과 투자가치를 지닌 동시대 아티스트와 작품을 대중과 아트 컬렉터에게 연결하는 정직한 예술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갤러리는 전시뿐만 아니라, 향후 아트펀드 등과 같은 사업으로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파이프갤러리는 개관전으로 사이먼고(Simon Ko) 개인전 ‘Soul to Soul’을 준비, 친밀감을 주제로 한 신작 25점을 내건다. 사이먼고는 뉴욕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에 있어 따뜻하고 충만한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에 몰두해왔다. 캔버스 속 인물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 경험하는 희망, 절망, 질투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의 화면을 통해 쉽게 놓치기 쉬운 미묘하고 깊은 감정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11월 20일까지.

◆4년 만에 4배 확장 이전한 ‘페이스 서울’
세계적인 갤러리인 페이스(Pace) 서울은 지난 5월 한남동 르베이지 빌딩으로 확장 이전했다. 2017년 서울 지점을 개관한 이래 꾸준히 매출액이 성장해오며 4년 만에 새 둥지로 옮긴 것이다. 본래 이 자리에는 미슐랭 레스토랑인 비채나와 부자피자가 있었으나 페이스가 두 층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이전에 바로 건너편 폭스바겐 매장 건물에 입주해 있던 때보다 4배 커진 전시 공간을 확보했다.
뉴욕 갤러리이지만 한국적인 분위기를 가미하기 위해 탁 트인 넓은 전시장 곳곳에는 삼베 파티션, 전통 문양의 목각 등을 배치했다. 빌딩을 건축한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대표가 전시장 인테리어도 맡았다.


샘 길리엄과 조엘 샤피로에 이어, 새로운 공간에서 세 번째로 선보이는 작가는 모빌 조각으로 잘 알려진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제작된 조각과 종이 작업으로 구성된 개인전이 11월 20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금속과 철사로 제작된 대표 모빌 작업인 ‘Untitled’(1969), ‘Untitled’(1963)을 비롯해 작가가 인도 여행 중 제작한 독립형 조각 ‘Franji Pani’(1955)도 볼 수 있다. 특히 칼더의 귀한 종이 작업도 내걸렸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제작된 잉크와 과슈 작업은 다채로운 색감의 배경 위에 역동적인 검은색 선, 조각 작업을 시각적으로 반영하는 기하학 형상이 그려져 있다.

◆메가 갤러리가 만들 메가급 변화 ‘타데우스 로팍 서울’
유럽 정상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이 아시아 최초 보금자리로 택한 곳은 서울이다. 독특한 외관을 지녀 건축 명소로 자리매김한 포트힐 건물 2층에 200평 규모로 차린 전시장은 양태오 디자이너가 인테리어를 맡아 현대적이면서도 동양적 요소를 녹여내어 감각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그간 타데우스 로팍은 런던, 파리, 잘츠부르크 등에서 5개 전시 공간을 운영해오며 길버트 앤 조지, 아드리안 게니, 안토니 곰리, 알렉스 카츠, 토니 크랙, 엘리자베스 페이튼 등의 전시를 개최해온 만큼 서울에서도 해외 유수의 작가 전시를 선보이며 국내 컬렉터의 선택권을 넓히고 미술시장에 더욱 다채로운 컬러를 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 지점의 첫 전시 주인공은 동시대 미술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는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다. 작품의 구도를 거꾸로 뒤집는 방식으로 잘 알려진 그는 20세기 후반 독일 예술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1960년대 이후 국제 미술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타데우스 로팍 서울을 위해 제작한 신작 24점을 내건다. 이번 전시 타이틀인 ‘가르니 호텔(hotel garni)’은 프랑스어로 저가 호텔을 의미하는데, 이는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에서 착안해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가미돼 지어졌다. 11월 27일까지.


◆구찌가옥 그 건물 지하에는 ‘파운드리 서울’
지난 6월 개관한 파운드리 서울(Foundry Seoul)은 파이프 자재 제조기업 태광이 모회사다. 조각가 박승모가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로 제작한 거대한 외관 파사드로 화제가 됐었던 구찌가옥이 입점한 그 건물 지하에 전시장이 들어섰다. 실험적인 매체를 다루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국내외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인 바이파운드리(BYFOUNDRY)는 1층에서 운영한다. 총 300평에 달하는 규모의 공간은 컨템포러리 아트로 채워질 예정이다.


현재는 미국 작가 이건 프란츠(Egan Frantz)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Not Enough Words’을 12월 19일까지 진행한다. 지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항상 도전적인 과제를 던지는 동시대의 작가 이건 프란츠는 물질 혹은 현상의 본질과 언어가 맺는 관계를 다양한 매체와 재료, 기법을 아우르는 작품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탐구해오고 있다.
같은 기간 바이파운드리에서는 미디어 아티스트 장명식의 첫 개인전 ’SURREAL JELLY’가 열린다. 제약 없는 디지털 세계 속, 작가가 무한한 상상력으로 구축해 낸 비정형의 반짝이는 젤리들의 초현실적 미감을 선보일 이번 전시는 이미 동시대 예술의 중요 장르로 자리매김한 미디어 아트와의 신선한 만남의 기회가 될 것이다.

◆다시 시작된 쇼타임,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이 단장을 마치고 재개관하며 4년여 만에 기획전을 열고 긴 동면에서 깨어났음을 공표했다. ‘인간, 일곱 개의 질문’전(展)은 국내외 작가 51명의 작품 130여 점을 통해 모든 예술의 근원인 ‘인간’을 돌아보고 유례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고찰하고 미래를 가늠해보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장을 채 들어서기 전부터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와 조지 시걸(George Segal)의 조각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전시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면 저 멀리 론 뮤익(Ron Mueck)의 거대한 두상 ‘마스크Ⅱ’(2002)가 보이는데,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갈수록 그 스케일과 사실적인 묘사에 압도돼 눈을 뗄 수 없다. 아직 제대로 관람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호화스러운 작품들과 이를 보여주는 현란한 방식에 혼이 반쯤 나간 기분이다. 리움미술관의 쇼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이브 클렝(Yves Klein),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앤디 워홀(Andy Warhol),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등의 작품으로써 인간 존재와 우리를 둘러싼 관계들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당연시해 온 인간적 가치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이 확산된 20세기 중반의 전후(戰後) 미술을 필두로, 휴머니즘의 위기, 포스트휴먼 논의와 더불어 등장한 다양한 작품을 7개 섹션으로 나눠 걸었다. 내년 1월 2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