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가 된 글자… “읽을 순 없지만 감정은 고스란히”

입력 : 2021.06.18 23:59

[고산금]
진주알로 옮긴 문자, 다층적 시각 언어로 탈바꿈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 자 한 자씩 지나갈 때마다 영롱한 흔적이 남는다. 진주가 된 글자는 시간이란 줄에 꿰여 화면(畫面)으로 빚어진다. 고산금(56)은 새하얀 우드패널 위에 핀셋으로나 겨우 집을 정도의 자그마한 새하얀 진주알을 수없이 촘촘히 붙이는 독특한 조형 언어로 잘 알려져 있다. 글자 한 자는 곧 진주알 한 알이다. 글이 없으면 그의 화면도 없는 셈이니, 글과 그의 작업은 그야말로 불가분의 관계다. 다독가이기도 한 작가에게 작업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 독서라고 하니 놀랍지 않다. 신문기사, 소설, 노랫말부터 법률 서적에 이르기까지 관심 취향이 다양한 만큼 그의 작업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아낸다.
 
글자 하나하나는 진주알 한 알 한 알로 치환되며 문자의 기능은 상실되고 본래의 역할은 무화된다. 읽을 글자가 없지만 앞에 선 관객은 어느새 그의 작품을 읽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글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그 지점을 고산금은 아름다운 진주로 한 알 한 알 대신한다. 감동의 한 구절, 충격의 한 구절을 진주가 대변해주니 누구는 기쁨을, 누구는 슬픔을 각자의 감상대로 마주하며 보이지도 않는 글을 읽게 된다. 문자는 작디작은 오브제로 대치되지만 그 의미는 보다 확장되며 다층적인 시각 언어로 작동된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글과 작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작업에 차용하는 글은 어떻게 고르나.
 
“어떤 글이 됐든 그 텍스트를 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느낀 내 감정이 조금 강렬했다든지, 인상이 깊은 것을 위주로 먼저 추린다. 나의 주관과 감정으로 고른 텍스트이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뉴스든 소설이든 모두 우리네 세상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를테면, 국회법 일부를 화면에 옮긴 적이 있는데, 이는 우연히 본 뉴스에서 기인했다. 뉴욕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TV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이 주먹싸움하는 걸 봤다. 저게 과연 실제 벌어진 일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내게 충격적이었다. 대체 저런 주먹다짐이 가능하긴 한 건지 궁금해 국회법을 읽으면서 이를 화면에까지 옮기게 된 거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인가. 
 
“‘빵 굽는 타자기’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홀린 듯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한 권을 다 읽어냈다. 작업에 치여 사다 놓고 여태 읽지 못한 책이 산더미인데 틈만 나면 조금씩이라도 읽고는 있다. 매일 아침 기사를 읽는 건 여전하다. 기분 내키면 예전처럼 종이신문을 사기도 하지만 주로 온라인 뉴스를 읽는다. 세상일 돌아가는 걸 글로 배운다고나 할까. 그렇게 재밌을 수 없다.”
 
하도 작아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4mm짜리 인공 진주알을 핀셋으로 집어 글루건으로 한 알 한 알 붙이기를 거듭하는 인고의 시간 끝에 작품 한 점이 완성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하도 작아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4mm짜리 인공 진주알을 핀셋으로 집어 글루건으로 한 알 한 알 붙이기를 거듭하는 인고의 시간 끝에 작품 한 점이 완성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재료적 특성 덕에 섬세하고 우아한 면모가 돋보인다. 진주알을 소재로 삼게 된 계기는. 
 
“뉴욕에서 유학할 때, 웨딩용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숍에 들러 재료로 쓰기 위해 진주나 비즈 따위를 싼값에 사들이곤 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던 때라 자연스레 그런 재료에 눈이 갔던 것 같다. 작업 초창기에는 글루건으로 작은 물방울 모양을 만들어 화면을 채우는 작업을 했는데, 그러면서 옆에 진주 몇 알을 간간이 붙이는 정도로 활용했었다. 그러다 이 작업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며 아예 진주로만 빼곡하게 채우는 지금의 작업에 이르게 됐다.”
 
열에 맞춰 정교하게 작업하기 위해 글자 간의 간격을 일일이 재가며 진주를 붙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열에 맞춰 정교하게 작업하기 위해 글자 간의 간격을 일일이 재가며 진주를 붙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일일이 손으로 진주를 붙이길 거듭하며 완성한다. 본래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지금의 수공예적 작업에 이르게 된 동인(動因)이 있다면.
 
“이대 서양화과 재학 시절부터도 마티에르가 강하고 물성이 도드라지는 페인팅에 몰두했었다. 이후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 다니면서는 다양한 재료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아크릴 거울, 양초, 천, 못 등 잡다한 재료를 시도해보니 붓보다도 다루기가 더 재밌고 편하더라. 오브제를 갖고 하는 작업이 그렇게 흥미로웠다. 이것저것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전위적인 면모가 있었던 듯하다. 다만 여전히 나는 현재의 작업을 페인팅으로 분류한다. 진주가 올라갈 우드패널에 아크릴 물감을 100번 이상 바르는 밑칠 작업에 상당한 공력을 쏟고 있다.”
 
──글을 옮기지만 정작 읽을 수는 없다. 기호로서의 기능을 상실시키지만 동시에 다의적인 시각 언어로 작동시키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를 화면으로 옮기는 일련의 과정을 오마주라고 지칭하고 싶다. 즉, 오마주의 감정을 화면에 진주로써 심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이란 것은 보는 이마다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혹자는 아름다움을, 또 다른 누군가는 슬픔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작품은 서로 다른 스토리를 담고 있기에 마치 행간을 읽어내듯 각 작품에 존재하는 모호한 경계를 각자 마음 가는 대로 감상하면 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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