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6.04 18:09
[엘리엇 헌들리]
내면 깊은 곳의 무의식, 드로잉에서 발견하다
아시아 첫 개인전 ‘종이와 대화하면서’
19일까지 삼청동 백아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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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헌들리(Elliott Hundley·46)의 드로잉에는 자아가 없다. 작가의 자아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의 그림은 시작된다. 헌들리에게 드로잉은 명상과도 같다. 무아의 경지에 이른 듯 그는 내면 깊은 곳의 숨은 이야기를 드로잉으로써 종이 위에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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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들리는 눈을 감은 채로 드로잉을 시작하는데, 어떠한 형상을 그릴지에 대한 계획은 없다. 그 순간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표현한다. 사전에 형성된 이미지나 기본 윤곽조차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무계획의 과정에서 길을 잃다가도 우연 속에 기대 없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작가에게 있어 의식이란 단련될 수 있는 능력이 아닌, 우회할 수 있는 구속, 피해가야 할 제한, 깨버려야 할 장애물, 넘어야 할 경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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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들리는 자신의 드로잉 위의 복잡하고도 알 수 없는 형상들이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보는 이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고자 한다. 이성적인 통제력을 넘어서 우연히 발아한 헌들리의 화면에서는 알 듯 말 듯한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혼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없다. 오히려 복잡함 그 자체가 작가의 목표다. 드로잉을 통해 작가 또한 자신도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돌아보곤 한다.

헌들리는 유명 컬렉터와 구겐하임, 휘트니 뮤지엄, MoMA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며 30대에 이미 스타작가로 부상했다. 지난 4월 작고한 LA 브로드 뮤지엄(The Broad) 설립자 엘리 브로드(Eli Broad)가 그의 작품을 다수 컬렉션 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2012년 미국 월간지 ‘아트 앤 옥션’이 선정한 ‘미래의 소장 가치(collectible)가 있는 50인의 미술가’로 선정되는 등 컬렉터와 미술계의 편애를 받아왔다. 이외에도 다키스 조아누(Dakis Joannou), 딘 발렌타인(Dean Valentine), 아니타 자블루도비츠(Anita Zabludowicz) 등 미술계 중심에 있는 유명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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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그의 대표작은 사진과 신문기사, 다채로운 사물을 이용한 거대한 콜라주 평면 작업이다. 수많은 오브제를 모으고 분류해 이를 작품으로 만들어왔는데, 신화와 고대 연극에도 관심이 높아 그의 작품에서는 다채로운 서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대학교 시절 중국화를 배운 덕분에 동양적 요소와 오브제도 적극적으로 화면에 도입한다.

백아트(Baik Art) 서울은 그의 평면 작업뿐만 아니라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를 마련했다. 아시아 최초로 마련된 엘리엇 헌들리 개인전 ‘종이와 대화하면서(Working on Paper)’는 작가의 작업 생애 최초로 기획된 드로잉 전시이기도 하다.
폭발하는 듯한 강렬한 예술적 에너지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헌들리의 드로잉은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작업 중 바탕지가 부족하면 즉흥적으로 종이를 추가해 이어붙이기도 한다. 때론 손에 묻은 물감을 종이에 닦기도 하고, 손을 닦은 페이퍼타월을 화면에 붙이기도 하는 유머러스함도 있다.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패겔(David Pagel)은 이번 전시 서문에서 “엘리엇에게 매일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마치 그의 예술에 필수적 요소들이 떠오르는 부글부글 끓는 스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작업의 활력소이며,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전력을 공급해주는 맥박과 같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6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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