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한국 미술 오리지널리티①] 타고난 모험가 ‘박래현’을 기억해야 할 이유

입력 : 2021.01.29 18:41

모험가적 기질로 과감한 전위적 시도 선구자
새로운 기술 도입하며 주기적으로 화풍 변화
동양화의 현대적 해석을 몸소 실천한 작가
아트조선 공동기획 TV CHOSUN 개국 10주년 특별 기념
3월 조선일보미술관 ‘더 오리지널’展 미공개작 다수 공개

박래현 /국립현대미술관
박래현 /국립현대미술관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1948년, 수필 ‘결혼과 생활’ 중)
 
국립현대미술관《박래현, 삼중통역자》전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박래현, 삼중통역자》전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방탄소년단 RM이 최근 본 가장 인상 깊은 전시로 꼽았던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박래현(1920~1976)은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선구적인 작가다. 청각장애인이자 자신보다 더 잘 나가던 화가 남편 운보 김기창을 뒷바라지하고 네 아이를 키우면서 틈날 때마다 붓을 들던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었다. 그러나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여성들의 선망이 될수록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칭할 뿐이었다.
 
이른 아침, 종이에 채색, 238x179cm, 1956 /아트조선
이른 아침, 종이에 채색, 238x179cm, 1956 /아트조선
 
누구의 아내란 그늘에 가리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박래현의 대규모 개인전이 지난해 9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다.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전(展)을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가사의 굴레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한 작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없는 현실과 그런 자신을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번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된 와중에도 박래현은 굴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전위적인 행보와 실험적인 시도를 지속적으로 내보이던 선구자이자 모험가였음을 오늘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작품21, 종이에 채색, 137.2x122cm, 1968 /아트조선
작품21, 종이에 채색, 137.2x122cm, 1968 /아트조선
 
작가는 평안남도의 부유한 집안 장녀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는데, 본래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큰 주삿바늘이 무서워 꿈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술에도 소질을 보여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대신 사범대로 진학하나 결국 고집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그의 특출 난 소질은 재학 중 그린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하며 인정받게 된다. 
 
단장, 종이에 채색, 131×154.7cm, 1943 /국립현대미술관
단장, 종이에 채색, 131×154.7cm, 1943 /국립현대미술관
 
당시 박래현이 거주하던 하숙집 딸을 모델로 해 거울을 바라보며 단장하는 여성을 그린 그림이었다.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는 큰 화면에 검은 옷을 입은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대조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의 기량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박래현의 작업 일대에서 여성 인물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총독상 수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당시 전람회 심사 위원이었던 김기창을 만나 첫눈에 반해 결혼하게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이때 박래현이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라는 조건을 내걸고 결혼을 했다고 하니 생전 작가에게 작업이 어떤 의미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족의 말에 따르면 김기창은 겨울이면 김장을 도울 정도로 가정적인 면모가 있었다. 박래현 또한 네 자녀의 어머니로서 가족에 헌신적이었으나 여타 평범한 주부처럼 남편의 수발을 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작가의 속마음은 수필 ‘남편 시중기’(1962)에서 드러난다. “순수한 가정주부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술에만 몰두한다는 것도 허용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니만큼 항상 마음이 복잡한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오랜 시일 이러한 속에서 단련을 받아 온 나는 지금 남편에 대한 시중을 정신적인 면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새, 종이에 채색, 52.5x68.5cm, 1958 /아트조선
새, 종이에 채색, 52.5x68.5cm, 1958 /아트조선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 한국 화단에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화가는 귀하다. 박래현은 김기창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후에는 그를 뛰어 넘는 기량을 보여준다. 김예진 학예사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작가로서의 예술 세계를 절충하고 균형을 맞추는 데 일생을 쏟은 작가”라고 했다. 작가는 학교 선후배이자 같은 시대 활동했던 천경자와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천경자는 여성을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박래현은 생활인으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 학예사는 “작가는 자기 삶을 낭만화하거나 현실을 외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여성임에도 생활인으로서의 의식이 강해 자신이 여성이란 것에 대해 깊이 자각하며 이를 화면에 옮겼다”고 말했다.
 
작품7, 종이에 채색, 137x122cm, 1965 /아트조선
작품7, 종이에 채색, 137x122cm, 1965 /아트조선
 
특히 그는 동양화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데 거침이 없었는데, 동양화를 당시의 시대 양식과 맞물려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고민했다. 1960년대에 추상화풍을 도입할 때도 그저 화법을 전향한 것이 아닌, 동양화로서의 추상화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동양화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추상화를 내놓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단순히 안 쓰던 재료를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동양화의 근원적인 정체성에 기반한 주제의식을 갖고, 동양화란 매체를 시대에 맞게끔 발전시키고 변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와 구별되는 동양화만의 특질을 살리고 그 당시 세계 화단에서 유행하던 추상화를 동양화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은 오늘날 봐도 세련된 화면으로 전해진다. 
잊혀진 역사 중에서, 종이에 채색, 150.5x135.5cm, 1963 /국립현대미술관
잊혀진 역사 중에서, 종이에 채색, 150.5x135.5cm, 1963 /국립현대미술관
 
이는 1963년 김기창과 함께 한 일곱 번째 부부전에서 잘 드러난다. 박래현은 해당 전시에 붉은색, 노란색, 검정색 등 강렬한 색채가 한지에 흠뻑 스미고 번져나가는 형상을 표현한 작품 다수를 출품했다. 이들 작품은 <잊혀진 역사 중에서>란 단일 제목으로 전시됐는데, 이를 두고 박래현 스스로 ‘역사 이야기에서 색과 이미지를 찾아 환상적으로 표현한 추상화’라고 설명한 바 있다. 서로 다른 원형들이 검은 선으로 연결되고 서로 다른 색채가 한지 위에 번지며 섞이는 모습을 통해 역사를 형상화한 것이다. 물감을 흘리고 뒤섞고 흩뿌리는 등의 다소 전위적일 수 있는 기법을 마음껏 행하며 시대와 역사에서 느끼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현대의 시각에서 견주어도 이질감 없는 도회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박래현 특유의 조형언어다.
 
이를테면, 번짐, 드리핑, 두드림, 갈필 등 역동적 방식을 통해 작업해 한지에 그린 것임에도 오일페인팅의 마티에르가 주는 그것에 비견하는 감성을 재현해내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배경에 아교를 칠하고 그 위에 먹을 발라 스며들지 않아 겉도는 효과를 낸 추상화를 제작하는데, 이때 작업한 회화가 이른바 ‘맷방석 시리즈’ ‘엽전 시리즈’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다. 이는 김기창 선생이 다른 이들에게 아내의 그림을 쉽게 설명하고자 맥반석이나 엽전의 모양에 빗대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와 작품명처럼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붉은색은 인간의 피의 색으로 인간을 상징하고, 노란색은 태양, 검정색은 번뇌를 상징하는 색으로 쓰였다고 박래현이 직접 밝힌 바 있다.
 
노점, 종이에 채색, 267x210cm, 1956 /국립현대미술관
노점, 종이에 채색, 267x210cm, 1956 /국립현대미술관
 
실험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작가의 면모는 일찍이 1950년대 작품에서도 보여 진다.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풍의 <이른 아침>과 <노점>은 1956년 각각 대한미협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의 영광을 연이어 안겨준 그의 대표작이다. 일견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하는 듯한 화풍을 통해 박래현이 당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평범한 풍경을 그린 것으로, 평소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색상의 배합에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던 여성화가 박래현의 성향이 읽힌다.
 
태고, 종이에 동판화, 57x31.5cm, 1970년대 초 /아트조선
태고, 종이에 동판화, 57x31.5cm, 1970년대 초 /아트조선
기억(Recollection), 에칭, 애쿼틴트, 60.8×44cm, 1970-73 /국립현대미술관
기억(Recollection), 에칭, 애쿼틴트, 60.8×44cm, 1970-73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하며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까지 폭넓게 탐구한 그의 자취는 한국 미술사에서 선구적인 행보로 기록될 만하지만 가부장제 시대를 관통하며 그의 이름 석 자는 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란 호칭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실제 김기창은 평소 자식들에게 “네 엄마는 더 클 수 있었는데 나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했다고 한다. 특히 1976년 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마땅히 평가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박래현의 작품 다수를 소장하고 있는 컬렉터 A씨는 “우리나라 근대미술 작가 중에 주기적으로 화풍이 변화한 작가는 드물다. 추상화, 판화에 이르기까지 작풍이 급변한 작가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눈에 띤다. 동양화라고 해서 고리타분한 게 아닌, 요즘 시각으로 봐도 너무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에 반했다. 한지인데도 한지로 느껴지지 않는 점도 신기하다”라며 작가 고유의 특성을 짚었다.
 
김예진 학예사는 “지금의 시각으로도 굉장히 도전적이었던 박래현의 행보를 살펴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미국에서 판화를 배우고 귀국한 뒤에는 판화와 동양화를 결합한 새로운 방향이라 선언하며 야심차게 신작을 구상했으나 시범으로 소품을 몇 점 남기고 갑작스레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면 알수록 더욱 대단한 작가”라고 말했다. 
 
작품, 종이에 채색, 121x105cm, 1960년대 중반 /아트조선
작품, 종이에 채색, 121x105cm, 1960년대 중반 /아트조선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 마련된 개인전을 계기로 박래현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제껏 작가의 개인전이 쉬 마련되지 못한 데에는 작품 대부분이 개인 컬렉터에게 소장돼 있기 때문이었다. 해당 전시 출품작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뮤지엄산, 가나아트, 아라리오 등의 기관 외 상당 부분이 개인소장인 것으로 알려진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은둔의 컬렉터들이 일찍이 박래현의 가치를 알아봤기에 그의 작품이 발굴되고 재조명되는 데 일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렵사리 세상에 알릴 기회를 얻은 만큼 동양화의 확장을 고민하고 몸을 던져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박래현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한편 다가오는 3월 9일부터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TV CHOSUN 개국 10주년을 기념해 아트조선 공동기획으로 개최되는 특별전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전: 더 오리지널’에서 박래현의 미공개 작품 다수가 내걸릴 예정이다.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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