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차가울지라도 태생은 용해로… 이중적인 그대, 유리”

입력 : 2021.01.15 22:50

[유충목]
“유리의 다변적 물성에서 생명력 느껴”
개인전 ‘포메이션’, 2월 14일까지 파주 스튜디오 끼
김창열 ‘물방울 그림’ 오마주한 평면 신작 등 선봬

단체전 ‘도시5감’에 설치된 작가의 대표작 ‘Mutation’ 시리즈(2019, 익산시립미술관) /유충목
단체전 ‘도시5감’에 설치된 작가의 대표작 ‘Mutation’ 시리즈(2019, 익산시립미술관) /유충목
 
깨지거나 안 깨지거나 둘 중 하나다. 유리에는 중간이 없다. 유리라고 하면 으레 차갑고도 단단한 유형의 사물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본래 그 태생은 한없이 뜨겁고도 유연하다. 섭씨 천 도가 넘는 가마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고 생동하고 요동하며 유리는 그제야 생명을 얻는다. 고온을 벗어난 뒤에는 실온에서 서서히 식어가며 길들여지듯 찬란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 다가오는 그 무엇이라도 다 녹일 것처럼 불같고 제멋대로이지만, 가마 밖으로 나와 사람 손을 타며 점차 순응적으로 변해간다. 차갑게 식은 유리는 감추고 있던 본연의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주위의 모든 것을 영롱하게 비춰 담아낸다.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매서운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죠. 까딱하면 한순간 깨져버리니까요. 이러한 성질이 인간의 양면성과 닮지 않았나요?”
 
유충목 작가가 개인전 ‘포메이션’에 출품된 ‘Retrospect’(2020) 앞에 섰다. /스튜디오 끼
유충목 작가가 개인전 ‘포메이션’에 출품된 ‘Retrospect’(2020) 앞에 섰다. /스튜디오 끼
 
유충목(44)은 유리를 통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해왔다. 미국과 영국에 거주하며 해외 활동에 매진하다가 2015년 귀국 이후 국내 미술계를 종횡무진하며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직관적인 유리조각으로 아트 컬렉터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2018년부터는 장흥 가나아뜰리에의 입주 작가로 있는데, 특히 그가 가나아뜰리에에 들어가게 된 흥미로운 일화는 미술계에 작가의 이름을 알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마땅한 스튜디오를 마련하지 못한 작가는 당시 운영하던 카페의 영업이 끝난 밤이면 주방에서 작업을 이어가곤 했다. 그렇게 불철주야 일하며 제주 스페이스예나르(2018)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어느 날 한 남성 관람객이 방문해 작가의 유리 조각을 한참 감상하더니 작품가를 물었다. 마침 전시장을 혼자 지키고 있던 작가는 가격은 갤러리와 상의해야 한다며 그를 돌려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남성이 이번에는 대뜸 작업실이 어디냐 물었고 카페 주방이라고 답하는 작가의 말을 듣곤 가만히 있더라는 것이다.
 
그 남성은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이었다. 당시 6월 개막한 작가의 개인전에서 그의 유리 조각을 눈여겨본 이 회장은 곧장 그해 7월 중순 일정으로 개인전을 제안했고 이에 성사된 것이 인사아트센터에서의 초대 개인전 ‘변이(Mutation)’였다. 이후에는 가나아뜰리에의 입주로 이어지게 됐다. 
 
Fomation(White), 73x61cm, Glass, Mirror, 2020 /유충목
Fomation(White), 73x61cm, Glass, Mirror, 2020 /유충목
 
영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다소 극적인 이 일화에 유충목이 단순히 운이 좋은 작가로만 보일 수 있으나, 그의 작업은 이미 해외에서 일찍이 인정받았다.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인 대학 시절, 미국 유리 제조기업 코닝(Corning)사에서 선정한 ‘세계 신진 유리작가 100인’(2003)에 뽑혔으며, 같은 해 미국 유리예술협회(Glass Art Society)에서 여는 국제 유리예술학회 전시 작가로도 선정됐다. 화려한 수상 이력 덕분에 곧바로 ‘칼슨 글라스 웍스(Carlson Glass Works)’의 디자이너로 발탁돼 근무하며 동시에 자신의 작업을 병행해갔다. 이후에도 뉴욕, 시애틀 등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꾸준히 가지며 작가로서의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작가는 영국으로 건너가 선더랜드대학원에서 유리를 전공, 수석으로 졸업했다. 
 
평생 유리 하나에 매진해온 그가 유리에 매료된 계기는 서울미술고등학교 재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소전공으로 흙이나 철, 나무만 조각 재료인 줄 알았던 그가 우연히 유리 제작 과정을 보고 한눈에 유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용해로에서 막 꺼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유리를 핸들링하며 마치 생명체를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 생명력을 자신의 작업에도 불어넣고 싶었다. 
 
Formation-Moment1, 130.3x162.2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Formation-Moment1, 130.3x162.2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Formation-Moment1, 130.3x162.2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Formation-Moment1, 130.3x162.2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단순명료한 듯하면서도 다중적이고 반전적인 물성을 지닌 유리를 두고 그는 “거짓말 하나 못하는 아주 솔직한 재료”라고 설명한다. 톡 부러지면 그만이기에 유리는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다. 특히 제작 과정에서 공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나라도 실수가 발생하면 꼭 당장이 아니더라도 10년 후 갑자기 깨질 수도 있다. “전문용어로 ‘스트레스’라고 부르죠. 말로만 듣던 이 현상을 저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답니다. 6년 전 만든 컵이 책상 위에서 갑자기 깨져버리는걸요. 유리가 이렇게나 솔직해요.”
 
소재의 특성상 온도에 민감해 제작 과정에서의 타이밍과 속도감이 중요하며, 고도의 섬세함과 기술을 요하는 것은 물론이다. “재료를 몸에 익히고 기술을 터득하는 데 다른 매체에 비해 수행기간이 긴 편이죠. 유리를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10년은 꼬박 걸렸습니다.”
 
Formation-Moment5, 104x115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Formation-Moment5, 104x115cm, Glass, Acrylic on Canvas, 2020 /유충목
 
유충목 개인전 ‘포메이션(Formation)’이 경기 파주 문발동 스튜디오 끼에서 열리고 있다. 그간 유리 조각을 주로 선보여온 작가가 이번에는 회화 매체를 접목한 평면 작업을 내걸었다. 이는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을 오마주한 것으로 황목천에 유리 물방울을 얹어 현실과 환상의 묘한 경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절친’ 윤위동 작가와 함께 협업한 우정 헌정 작품도 눈길을 끈다. 윤위동의 시그니처인 하이퍼리얼리즘의 돌 그림과 유충목의 유리 물방울이 한 화면에 어우러진 컬래버레이션 작업으로, 의미 있는 볼거리를 선사한다.
 
유리 조각에서부터 캔버스를 소재로 한 평면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에게 다음 행보를 물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유리가 주 매체이긴 하나 저는 항상 여러 소재를 함께 사용하는 걸 즐겼어요. 다양한 소재를 융합해 현대미술의 구분과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준비 중입니다.” 전시는 2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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