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0.26 21:38
뭉개어 거칠게 표현한 형태, 어두운 색채 등 변모 꾀한 신작
11월 8일까지 가나아트 나인원

고요한 어둠 속에서 마치 촛불을 밝힌 듯한 은은한 따스함이 감돈다. 황색 빛깔이 그윽하게 배어있는 문형태(44)의 독특한 화면은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이 포근하다. 황토와 물을 섞어 캔버스에 입히고 이를 건조해 걷어 낸 후 그림을 그리는데,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은 모든 존재는 결국 흙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모든 작품에 흙을 바름으로써 자신의 손을 떠나게 되는 작품들과 미리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인사를 대신하는 이 행위를 통해 작가는 작업 과정 전반에 걸쳐 삶에서 느끼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과 예리한 감수성을 작품에 부여한다.


인간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삼아 캔버스 위에 감정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이 초점을 두는 주요 개념 다섯 가지를 숫자화해 그림에 등장시키고, 이로써 자신과 타자와의 교류 중에 발생하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1은 자신, 2는 관계, 3은 가족, 4는 사회, 5는 고독을 상징하는 식인데, 이러한 고유의 표현 방식은 가족의 유류품을 정리하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의 외조부는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면지에 기록해 두곤 했는데, 이를 보고 작가는 한 사람의 생전 기억이 숫자로 단순화될 수 있음에 강한 인상을 받고 이 경험을 ‘기억의 코드화’라는 독자적 방식으로 시각화하기에 이르렀다.
문형태는 다채로운 색감, 인물과 공간을 천진난만하고 단순하게 표현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어 대중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작가다. 여기에 작가의 재치, 상상력에 기반한 독창적인 캐릭터, 이들이 만들어내는 내러티브 등은 작품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요소다.
이는 학창시절부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전후 북유럽 전위 운동 그룹인 코브라(CoBrA)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됐다. 특히 단순하고 자유분방한 도식, 겹겹이 쌓은 두터운 질감을 통해 유화의 전형에서 벗어났던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작품에 관심을 뒀다고 그는 설명한다. 문형태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화사한 색채, 내면의 감정이 표출된 듯 해체된 안면 묘사, 촉각적 질감을 부각시키는 두터운 마티에르 등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일상적 소재를 특유의 재치와 비틀기를 통해 몽환적 화면으로 구현하는 문형태의 개인전 ‘HYEONGTAE MOON’이 서울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열린다. 장흥 가나아뜰리에 레지던시 소속 작가로 가나아트와 인연을 맺은 문형태가 가나아트에 갖는 첫 개인전이다. 기존 작업과 구별되는 형식상의 변모를 시도해 거칠어진 선과 어둡고 짙은 색채로 보다 원숙해진 신작이 내걸린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지치고 피곤한 일상과 아픈 기억을 잠시 내려두고 상상의 세계에 빠지길 바란다는 작가의 소망처럼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타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나 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는데, 하루하루 나열되는 평범한 사건을 파편적으로 또는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화면 위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색다를 것 없는 일상에 위트와 유머를 더해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재치 넘치는 그의 작품 앞에서 잠시 힐링해보는 것은 어떨까. 11월 8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