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③]

입력 : 2020.08.18 14:27
◆[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는 작가의 작품과 작업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일상의 기록을 소개하는 코너로 Art Chosun에서 매주 2회 (화,목) 총 6주간 연재됩니다.
 
옛 뉴욕 작업실 전경 ©최울가
옛 뉴욕 작업실 전경 ©최울가
 
[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③] 자유스러움의 끝자락에 다가온 인연
 
하나에 얽매이지 않는 Freedom. 내 그림 중에는 크게 4가지 유형의 버전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90년대 이전의 한지 위에 색면으로 표현한 원초적인 컬러에서 출발한 Primitif 시리즈이다. 파리의 8ㆍ90년대는 주로 한지 위에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서 과슈 형식을 띤 그림들로써 물감이 스며들거나 번지는 감각에 매력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뉴욕으로 오면서 기존 아크릴 물감을 버리고 오일 페인팅을 시작하면서 White & Black 시리즈를 거의 16년간 계속해 오다 최근 Infinity 시리즈를 만나게 되면서 다소 그림의 재미와 안정감 그리고 약간의 숙연함과 공간의 미학, 서두르지 않은 듯이 차분하면서도 White & Black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다소나마 축소된 듯 한편으로 차분하면서도 단아한, 그리고 약간의 고급스러운 상업적 분위기...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설명보다는 한걸음 물러서서 전쟁처럼 그렸던 White & Black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공간성과 단색 톤은 White & Black 작업을 하면서 반복성에 무료해졌을 때 몇 점씩, 작업 후에는 한층 White & Black 작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예술적 감각을 고집했던 블랙 시리즈. 원시적이면서 자유스러움을 선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화이트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그 둘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Infinity 시리즈는 현악 사중주처럼 예술적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이 셋은 하나의 트리플 시리즈가 되어 나의 작업에 무료함을 그때그때 마다 새로운 감각을 선물하곤 한다. 그 무엇을 버리고 한 가지 작업만을 고집하기엔 너무나 암울하고 막다른 골목 벽에 부딪혀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음악 작곡자가 심포니만 작곡하고 콘서트만 작곡하지 않는다. 현악 사중주도 가곡도 아리아도 작곡하지만, 그 향기는 한 사람의 심중이 들어있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듯이 지금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감성에서 발전한  작업들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언제나 같이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추상적인 것으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면 그때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길을 갈 것이다. Infinity 시리즈와 White & Black은 같은 소재에 같은 언어가 들어있다. 하지만 어떤 추상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된다면 그곳은 정말 또 다른 사고와 환경이 반드시 만들어진 상태에서 출발할 것이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 모든 것을 버리겠다. 김환기 선생처럼. 하지만 그런 일이 올까? 사전에 브로드웨이 34가 삼각 공원에 앉아 같은 시간을 달리고 있는 수많은 국가의 사람들을 무심으로 바라본다. 18년 전에도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엊그제 같은데. 나와 같이 지내지 못했던  파리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터널 속을 걸어야만 했던. 
 
 
2001년 여름
 
Soho의 Spring St 길 끝에 있는 농구장 벤치에 앉아 2불 50센트짜리 슬라이스 피자를  먹다가 만난 한국인 교포 피터 Park을 만난 것이 삶의 지표가 바꿀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의 이런저런 미국의 삶을 듣고 공감하는 가운데 나의 작업실로 가게 됐고, 나의 그림들을 보고 난 후에 2점을 사겠다며 그는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매달 블랙 시리즈든 화이트이든 한 점씩 사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늘 만나서 아무리 친해졌다고 해도  분에 넘치는 선물이었다. 피터는 나보다 20살이나 더 많을 것 같은 나이. 
하지만 그런 건 별반 문제 될 게 없었고, 그의 아름다운 제의에 고마워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와 대화도중 그도 미국에 올 때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왔지만, 생활고에 지금까지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했던 것 같았다. 그는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 쪽에 큰 레스토랑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밤새 예술의 대한 짧은 인연, 긴 추억. 한국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헤어졌다. 어쨌든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9ㆍ11이 터지고 뉴욕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있던 그림들도 중심을 잃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암흑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White & Black 시리즈의 칭찬이 시리즈를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와의 연락이 끊어지며 14년이 흘렀고 한국 전화번호로 피터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자기도 한국인데 얼굴 한번 볼 수 있냐고. 많이 늙어있었다. 나도 그도 세월의 시간은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강남의 일식집에서 그동안의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락 못 한 사연도 들었다. 미국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려고 준비 중이라는데 기분은 영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의 고마움의 표현을 술을 마시는 동안 아끼지 않았다. 늦도록 자리를 하고 헤어졌다. 공항이라고 미국 들어가면 연락하겠다고 연락 온 후 1년을 넘게 연락이 없었고 갑자기 뉴욕 작업실에 천정을 보고 있다가 한국에 나온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 피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순간 잠시 머뭇거리는 나에게 누구시냐 물었고 나는 아버님 아는 그림 그리는 동생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아 그러시냐고 저의 집에 그림이 거실에 걸려있어서 안다고, 아버님은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한동안 아무 말 하지 못했고, 고인과 함께 소호의 농구장 앞에서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얘기하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 때문에 소천 하셨는지 묻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낡은 목조건물 흰 페인트칠이 벗겨진 천정을 올려다봤다. 녹슨 철제 창문 사이에는 비둘기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운다는 표현 보다 짖어댄다고 하는 게 맞다 조용한 밤이면 소리는 너무 크다. 녀석들이 그렇게 밤마다 울어댔지만, 오늘은 별반 시끄럽지 않은 것은 왜일까. 자장가 같았다.
“저기 흰 그림은 꼭 옛날 언어가 없을 때 원시인들이 그려 놓은 동굴벽화 같은데요?”
피터가 소호 4층 목조 건물 작업실에서 해준 말이다. 
 
◆ ARTIST INFO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0/20200810036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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