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8.12 22:58
[최울가]
‘아트조선 아뜰리에 프로젝트’
오픈스튜디오형 개인전 ‘인 더 비기닝’
9월 8일부터 파주 작업실
최신작 ‘레드 시리즈’, 세라믹 오브제 공개
2000년 뉴욕, 최울가(65)의 겨울은 지독히도 모질었다. 재료비를 아껴보겠다고 매일 아침 소호 거리로 나가 다른 작가들이 쓰고 버린 캔버스를 주워와 있던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며칠에 한 번 겨우 세수할 정도로 작업에만 매몰돼 살던 때 어렵사리 그린 그림을 모두 불태운다는 건 실로 있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피와 뼈와 살을 갈아 만든 작품을 어떤 작가가 제 손으로 불사를 수 있으랴. 그러나 최울가는 정말 다 불태웠다. 2008년 가을, 충주 작업실 마당에서 자신의 회화 200점을 직접 소각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전소되기까지 꼬박 4시간이 걸렸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결국 태워버리기에 이른 것이었다.

직접 실행에 옮기게끔 한 도화선은 데미안 허스트였다. 당시 뉴욕 가고시안에서 열린 데미안 허스트 개인전을 찾은 최울가는 얻어맞은 듯한 허탈함과 동시에 큰 깨달음을 득했다고 회고한다. “마치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회화에서 경거망동할 수 있는 모든 짓은 다 분출해놓은 것 같았어요. 과연 이게 진정한 자유로움의 회화인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죠.” 그날로 그는 그간 품어온 모든 그림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다시는 분별없는 자유로움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각오였다.
기존 작품을 태운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발표한 게 새로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다. 무작정 배출돼 터져 나오는 형상이 아닌, 한 번 여과돼 정제되고 조밀해진 자유로움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다. “이전에는 내 기분 따라 자유분방함을 표출했다면, 이후에는 색과 조형이 차분하게 눌어붙은 접착성 있는 화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최울가의 대표 연작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형상이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눈이 달릴 곳이 아닌 곳에 눈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사람 눈을 한 동물부터 물병에, 유리잔에, 시계에다가 눈을 붙이고 의인화를 했다. 눈이 생기자 사물은 생명을 얻고 할 말이 생겼다.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많아 수다스러운 그의 화면을 마주하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도 이 덕분이다.
이처럼 겹침 없이 다채로운 형상은 원시주의에서 비롯됐다. 프리미티프와 샤머니즘에 대한 질문은 최울가의 지난 40년 화업의 동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바로 동굴벽화였다. 질주하는 말, 상처 입은 들소 등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 행위에서 시작된 벽화는 눈으로 관찰한 형상을 세밀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인류 최초의 예술행위다.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 표현에 목말라 했던 최울가가 샤머니즘적 원시성을 색면화하는 작업에 천착하게 된 이유다.
모든 것을 섞으면 검은색, 모든 것을 해체하면 흰색이 된다고 하는데, 작가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에서 문명 이전의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를 오늘날 대신 읊고자 했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시대에는 인간과 사물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무게감을 지녀 각자의 언어적 역할을 수행했을 거라고 최울가는 믿었다. 십인십색 군상이 엉켜 돌아가는 하나의 세상사와도 같은 그의 그림 속에 똑같은 조형은 없다. 서로 다른 오브제는 각자 개성을 지닌 독립체로 존재한다.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형상과 암호 같은 기호와 문자, 단계적인 질서 없이 배치된 형상을 통한 비언어적 방법론으로 최울가는 인류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개, 여우, 하이에나, 늑대 네 동물에 빗대는 식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 이익을 위해 편향을 일삼는 삶, 부조리한 사회를 동물 캐릭터로써 묘사한다.


모양은 달라도 작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색면 도형이 있는데, 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최울가는 이를 ‘세이프티 가드’라고 부른다. 화면 속에서 원시적인 소재들이 맘껏 뛰놀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문지기이자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이정표인 셈이다. “이런저런 이미지가 어지럽게 산재돼 있는 가운데, 도망가는 형상을 어떻게 붙잡아야하나 고민하다가 불현 듯 떠오른 것이 저 도형이었어요. 알 수 없는 모양만 있다면 단순 추상에 그치겠지요. 그러나 그 안에서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가 있기 때문에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난립하는 방종 속에서 견고하고 뚜렷한 도형은 마치 문진처럼 화면 한 구석을 묵직하게 눌러주며 중심을 잡아주는 듯하다. 자유와 엄격함은 일견 상극 같아도 끝과 끝은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그 둘이 이룬 합일을 최울가의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이다.
블랙과 화이트에 이어 최근 레드를 새롭게 도입했다. 빨간색은 황토로 만들어져 동굴벽화에 사용된 최초의 색으로 알려진다. 최울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근원적인 자유, 순수함을 구현하는 데 이만한 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빨강은 색의 정점이에요. 수많은 색깔 중에서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있는 늠름한 대장 같다고나 할까요. 짧은 시간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감명을 주는 색이니까요.” 붉은색을 바탕 전면에 배치한 그의 최근작이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울가가 붉은 점으로 물들인 최신작 ‘레드 시리즈’와 대표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를 비롯해 처음 시도한 세라믹 오브제를 내건 개인전 ‘인 더 비기닝(In the Beginning)’을 자신의 아뜰리에에다가 차린다. 파주 헤이리마을에 위치한 그의 아뜰리에는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된다. ‘아트조선 아뜰리에 프로젝트(Art Chosun Atelier Project)’로 마련된 이번 전시를 통해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작가의 국내 작업실을 일반에 처음 개방하는 만큼 미술 애호가와 컬렉터에게는 작가와 직접 소통하고 그의 작업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근사한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는 9월 8일부터 9월 19일까지 휴일 없이 11:00~17:00 최울가 아뜰리에(경기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48-122)에서 열린다. 오프닝은 9월 8일 오후 4시.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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