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막대기부터 계량기까지… 이번엔 한국 실험미술이다

입력 : 2020.06.12 19:30

갤러리현대 50주년전 2부, 16일부터 일반 관람
본관에 박현기, 이강소 등 한국 실험미술 거장 한자리
신관은 문경원&전준호, 프랑스와 모를레 등 국내외 동시대 작가로 꾸려져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우주 05-IV-71 #200>(1971)를 공개하며, 주말이면 긴 입장 줄을 세우는 등 개관 50주년 기념전시 흥행몰이에 성공했던 갤러리현대가 전시의 두 번째 파트를 이어간다. 이번에는 한국 실험미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해외 유명 작가들의 신작을 최초 공개한다.
 
이승택, Untitled, 1982,알루미늄 파이프, 종이, 실, Dimensions variable /갤러리현대
이승택, Untitled, 1982,알루미늄 파이프, 종이, 실, Dimensions variable /갤러리현대
 
본관 전시장은 이승택, 곽덕준, 박현기, 이건용, 이강소 등 한국의 실험미술가의 대표작을 한데 모아 꾸려졌다.
 
올해 11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앞둔 이승택의 ‘비조각’ 개념과 작품이 놓이는 환경에 관한 그의 관심을 잘 드러난 <무제>(1982)가 40년 만에 다시 전시장에 공개된다. 표면에 종이를 감고 뭉치고, 이를 실로 감싸 선과 점 형태를 형상화한 쇠막대기 여러 개가 전시장의 벽과 바닥, 천장을 점유하며 배열돼 있다. 유기적인 형태의 밧줄을 사용한 벽 드로잉과 연장선에 있는 작품으로, 막대가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며 전시장 전체로 확장되어 관객이 전시장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이끈다.
 
곽덕준, 오바마와 곽, 2009, C-print, 150 x 105cm /갤러리현대
곽덕준, 오바마와 곽, 2009, C-print, 150 x 105cm /갤러리현대
 
한국과 일본 미술계에서 활약한 곽덕준은 명확하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의 구조와 질서에 ‘난센스의 미학’으로 응답하며 고유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드러내왔다. 출품작 <오바마와 곽>(2009)은 그가 1974년부터 지속한 ‘대통령’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작업이다. 그는 <포드와 곽>을 시작으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 때마다 타임지 표지에 실린 당선자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듯 연출한 사진을 제작해왔는데, 이에 대해 ‘세계와 나와의 관계가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계량기 작품 <2개의 계량기와 돌>도 눈여겨봄 직하다. ‘계량하는 것이 계량되고 있는’ 넌센스한 상황을 유머러스한 개념미술의 언어로 풀어냈다.
 
박현기, 물 기울기, 퍼포먼스 사진, 1979/2018, C-print, 각 60 x 50cm /갤러리현대
박현기, 물 기울기, 퍼포먼스 사진, 1979/2018, C-print, 각 60 x 50cm /갤러리현대
 
돌, 나무, 흙과 같은 자연의 물질과 TV, 거울, 유리 등 인공 물질을 병치하거나, 자연 풍경을 담은 영상을 건축적 설치와 결합하는 등 관념적인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구축한 박현기가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79)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물 기울기>를 기록한 사진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박현기가 들고 있는 모니터의 기울기만큼 화면 안의 물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도록 연출한 퍼포먼스로 실재와 허상의 경계를 질문한다. 자연물과 복제된 자연물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극적으로 드러낸 <무제(TV돌탑)>, 한지에 오일 스틱과 연필을 사용해 낙서처럼 선을 수없이 긋거나 자신의 작품과 수집한 골동품 일부를 그려 넣은 <무제> 연작도 함께 선보인다.
 
이강소, Liquitex-76124, 1976, 캔버스에 아크릴릭, 세리그래피, 50 x 65.1cm /갤러리현대
이강소, Liquitex-76124, 1976, 캔버스에 아크릴릭, 세리그래피, 50 x 65.1cm /갤러리현대
이건용, 布(포)-주머니, 1974, 천에 유채, 170 x 250cm /갤러리현대
이건용, 布(포)-주머니, 1974, 천에 유채, 170 x 250cm /갤러리현대
 
오늘날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아방가르드 작가 이강소와 이건용이 한창 한국 실험미술을 주도하던 1970년대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갤러리현대는 2018년에 이강소 작업 세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실험미술을 재조명하는 개인전 ‘소멸’을 개최했는데, 갈대를 석고와 시멘트로 고정해 실내에 전시한 설치 작품 <여백>(1971), 화랑을 주막으로 변신시키는 <소멸(선술집)>(1973), 파리비엔날레에서 호평을 받은 닭 퍼포먼스 <무제‒75031>(1975) 등을 재현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때의 작품들을 기록한 사진을 비롯해 캔버스 천과 이미지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전통적 회화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회화, 완성된 작품을 통해 형태와 재료, 나아가 공간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이끄는 조각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그린 것과 그려진 것 사이의 차이와 그 의미를 탐색한 이강소의 세리그래피 작업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건용은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한 이후부터 자신의 몸을 매체로 활용하는 퍼포먼스를 잇달아 선보였고, 이를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이라 지칭했다. 작가는 ‘논리’라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통해 당대 한국의 혼란한 정치·사회적 상황에 예술적 해석과 소통을 시도하는 한편, 미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이번 전시에는 캔버스를 정면으로 보지 않거나 캔버스의 뒤에 서 있거나, 손목과 팔꿈치를 각목으로 고정하는 등 작가의 신체가 놓인 조건 속에서만 일련의 선 드로잉을 남기는 대표 연작 <신체 드로잉>과 관련 기록 사진, 회화를 하나의 환영으로 해석해, 천에 주름을 만들어 물감을 뿌려 주름의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팽팽하게 펴서, 그림을 환영 그 자체로 다시 제시하는 <포(布)-주머니>(1974) 등을 내걸었다.
 
김민정, (왼쪽)Phasing, The Street /갤러리현대
김민정, (왼쪽)Phasing, The Street /갤러리현대
프랑수와 모를레, Prickly π Neonly No. 2, 1=3°, 2001, 20개의 네온튜브, 140 x 290cm /갤러리현대
프랑수와 모를레, Prickly π Neonly No. 2, 1=3°, 2001, 20개의 네온튜브, 140 x 290cm /갤러리현대
 
신관 전시장은 현대미술사의 주요 흐름을 대표하는 해외 작가와 회화, 사진, 조각, 미디어, 설치 등 한국 동시대 미술가의 다채로운 작품으로 구성됐다.
 
지그재그를 그리는 12개의 네온 빛이 공간을 재정의하는 프랑스와 모를레의 <Prickly π Neonly No. 2, 1=3°>와 밤하늘의 무수한 별자리가 한 장의 지도처럼 화면에 쏟아지는 이반 나바로의 신작 <Constellations>이 전시됐다. 또한 크기가 다른 색색의 사각형이 수직 줄무늬 위에 섬세하게 배열돼 부유하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헤수스 라파엘 소토의 <양면성-11>(1981), 붉은색 외부와 파란색 내부의 극적인 대비 효과가 돋보이는 로버트 인디애나의 조각 <AMOUR>(1998), 일상의 단어와 오브제의 이미지를 감각적 색감과 재조합한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Untitled>(2010) 연작, 다양한 클립과 매듭 형태를 확대하고 선으로 구획된 화면을 화려한 색으로 채운 사라 모리스의 추상화 <1980(Rings)>(2009)가 꼬리를 물 듯 전시장에 시각적 리듬을 형성한다.
 
문경원 & 전준호, 이례적 산책 II_황금의 연금술, 2018, 싱글채널 HD필름,13분 49초, 철조각, 모니터, 290(h) x 230 x 180cm /갤러리현대
문경원 & 전준호, 이례적 산책 II_황금의 연금술, 2018, 싱글채널 HD필름,13분 49초, 철조각, 모니터, 290(h) x 230 x 180cm /갤러리현대
강익중, 내가 아는 것들, 2018-2019, 나무에 혼합재료, 가변크기 /갤러리현대
강익중, 내가 아는 것들, 2018-2019, 나무에 혼합재료, 가변크기 /갤러리현대
 
더불어 문경원&전준호가 2018년 테이트 리버풀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던 <이례적 산책_황금의 연금술>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일본 가나자와의 어느 빈집과 한국의 자동화된 식물 공장을 교차시킨 시적인 영상과 부산에 버려진 폐선박의 잔해를 결합한 대형 영상설치작품으로,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동시대적 삶의 조건을 성찰한다. 이외에도 강익중, 김민정, 이슬기, 유근택, 도윤희, 박민준, 김성윤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갤러리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 미술사의 지난 발자취를 되짚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16일부터 일반에 개방되며,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7월 19일까지.
 
최우람, One(이박사님께 드리는 답장), 2020, Metallic material, soft Tyvek, electronic device (custom CPU board, motor), 250 x 250(w) x 180(d)cm /갤러리현대
최우람, One(이박사님께 드리는 답장), 2020, Metallic material, soft Tyvek, electronic device (custom CPU board, motor), 250 x 250(w) x 180(d)cm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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