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6.10 19:56
쌓아 올린 옻칠 갈아내길 반복… “다층적인 시간 들여다보는 작업”
옻칠작가 김덕한 개인전, 대전 이응노미술관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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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될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옻칠에 매료됐죠.” 영묘한 겹이 켜켜이 쌓여 그 경계가 모호한 화면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결과물로 과거에 쌓였던 것과 그 위를 덮은 색이 한데 어우러져 현재 보는 이의 모습을 비춘다.
김덕한(38)의 옻칠 회화는 오랫동안 복잡했던 자신의 현실을 화면 안으로 끌어들여 분해하고픈 욕망의 은유로 가득하다. 유년 시절부터 걸어온 다양한 삶과 사건을 녹여낸 표면은 곧 작가의 욕망 그 자체다. 옻 도료를 칠하고 이를 다시 벗겨내며 지난 과거의 모습을 하나의 화면에 켜켜이 쌓아내고 이는 어느새 순간의 사건으로 떠오르는 잠재적인 분출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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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에서 이러한 분출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옻으로 층층이 칠하면서 벗겨낸 평면회화와 입체작업이 그러하다. 기나긴 시간을 요하는 그의 작업은 그 지난한 시간이 중첩돼 작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옻칠을 칠하고 건조시키는 작업은 지문이 닳아 없어질 만큼의 인내와 고통을 수반한다. 작가는 한 가지 색을 바르고 건조되길 기다렸다가 사포질을 한다. 그리고 이를 끊임없이 거듭한다.
매끄럽게 갈아낸 추상적인 화면은 옻칠 특유의 색감들이 어우러져 장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치열하다. 칠하고 벗겨내길 반복하는 행위는 다시 동일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히며 상생하는 지점을 모색하는 과정과도 같다. 옻칠은 물성의 까다로운 기법과 더불어 고유의 깊은 색감이 특징적이지만, 이는 오로지 철저한 인내와 시간성이 뒷받침될 때만 허락된다. 김덕한은 시간과 노동이 깃든 층층의 색면을 다시 사포로 갈아내며 묵묵히 시간적 층위를 드러낸다.
김복수 미술평론가는 “김덕한 회화의 지점은 어떤 대상에 다가가기 위한, 대상과의 무수한 교감을 겹쳐놓은 통로다. 무한히 열려있지만 그 의미의 몸적 감각을 통해서만 음미하거나 볼 수 있는 특이성의 지점을 화면에 올려놓는다. 어떤 의도가 매번 다른 변주되는 시간과 몸이 마주치며 절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의도로 드러내는 것이 김덕한 회화의 맛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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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 기법과 재료인 옻칠을 주재료로 회화성에 대한 다층적인 실험을 모색해온 김덕한이 ‘2020 아트랩대전’ 4기 작가로 선정돼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다. 인간은 그에게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이번 전시에는 한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 보고 행성과 같은 모양의 구(球) 형태로 제작한 입체 작품 <Compressed>와 옻칠을 주재료로 한 대표 연작 <Overlaid>를 내보이며, 최신 설치 작품 <Division>도 최초 공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각 프레임에 담았던 과정을 전시 공간 전체에 구현해 물질과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외연을 해체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고자 한다.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때로는 대상과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교감을 화폭 안에 천천히 던져 놓거나, 때로는 옻칠이라는 물질적 개념에 가둬놨던 비자발적인 욕망을 분출하기도 하는 작가의 도발적인 작업을 만날 수 있다. 30일까지 열리며 온라인 사전 예약제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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