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과 적폐청산的 미술 담론②] 예술적 소통을 가두는 미술계의 철창

입력 : 2019.11.18 14:53
조선시대 민화 ‘화조도’ /아트조선DB
민중미술의 대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조선시대 민화를 예찬한다. 민화는 형식적으로 채색화이고 내용적으로는 길상(吉祥)이라며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이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힐링 아트(Healing Art)’라고 격찬한다. 그런데 윤 관장의 민화 예찬에는 자기모순이 있다. 행복을 담고 치유하는 그림이라는 특징은 그가 지향하는 민중미술과 거리가 너무나 멀다. 극과 극이다. 민중미술은 대체로 색깔도 조악하고 아픔과 저항을 강조한다. 이것을 보고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한 평론가에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널뛰는 미술관이 어떻게 가능한가?
 
조선시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조선시대는 양반과 상놈, 노비가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전체 인구의 40%가 노비였다. 노비에게는 인권이 없다. 양반이 맘대로 사고팔고 증여도 하는 재물에 불과하다. 전혀 일하지 않고, 재능이나 노력 없이도 문제없이 살 수 있는 양반이 노비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침탈하고 죽여도 호소할 곳이 없다. 노비가 고문받고 죽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사회였다. 그런데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은 조선시대의 이런 반인간적이고 비인권적 문제를 다루는 그림이 전혀 아니다. 김홍도의 <서당도> <씨름도> <타작도> 등에서는 조선 사회 신분제의 비인간적 현실은 묘사되지 않는다. 신윤복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요염한 기생과 풍류를 즐기는 양반 남자들,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동네 청년들의 키득거리는 설렘을 맛깔스러운 색을 겸비하여 묘사했을 뿐이다. 노동으로부터 특별 면제받은 양반 사대부의 사치스러운 기생 유희를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길상화라는 것도 길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염집 벽에 걸던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이다. 사회 문제를 거론하기는커녕 개인의 행복, 번성, 장수를 위해 그림도 한몫해 주길 바라는, 요즘 말로 ‘소확행’을 추구하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그림이다. 개인적인 소망과 관심이 주제이지 사회의식은 근본적으로 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나 풍속화는 당시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그들 간의 소통에 크게 성공했다. 지금까지도 단순히 민중뿐만 아니라 미술애호가에게 시대를 넘어 사랑받고 소통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이 되어 있다.
 
윤 관장을 비롯한 민중미술 운동가들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예술적 감성이나 소통을 편협하게 정의하는 듯하다. 억압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는 것이 소통이고 미술가는 이 일을 하는 존재라며, 민중미술의 큰 업적이 여기에 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평론가들이 전문가로서 일관성을 보여주려면, 과거나 현재나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와 농민도 소외받는 계층이고, 조선시대의 노비, 기생, 농민도 똑같이 천대받고 소외받는 민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현대 미술에서는 사회적 의식을 그렇게 강조하는 반면 조선시대에 가서는 사회의식 없는 민화를 그토록 칭찬하는가? 윤범모 관장은 마치 조선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눈을 감고 사회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적 자유를 발휘한 조선시대 화가들은 찬양하지만, 현대 미술가들에게는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이슈를 작품에 담아야 한다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 같다. 자가당착인 셈이다.
 
김홍도 <타작도>
김홍도 <타작도>
신윤복 <단오풍정>
신윤복 <단오풍정>
 
조선시대의 민중이나 현대의 민중이나 똑같다. 그들은 억압받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예술적 감성을 갖고 있다. 그 감성에 어필하는 미술작품에 즐거워한다. 자신의 아픔을 내세우는 그림만 좋아하지 않는다. 힘들고 지친 노동자도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오묘한 형태와 색깔의 혼합을 보고 감동할 수 있다. 추상적인 그림 앞에서 상념을 비우고 고정된 일상으로부터 잠시 일탈할 자유도 있다.
 
이런 보편적 감성이 시대를 넘어 소통한다. 그래서 김홍도나 신윤복 등의 그림에서 인간 삶을 엿보는 묘미를 느낀다. 일상적 삶의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친근함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되풀이되는 삶의 항상성(恒常性)을 현재에 재확인하는 애잔한 기쁨을 관객에게 준다. 민화의 솔직한 모사(模寫)나 순진한 변형은 웃음을 선사한다. 현재 범람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선(線)이나 색(色)과는 다른 어떤 은은한 예술적 흔적도 신기하다. 이런 소통이 돈이나 권력과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보내주고 삶을 우회하는 힘도 보태준다.
 
그러나 민중미술가들은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는 작품만이 민중에게 어필한다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그림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며 민중의 미술의식을 격하하기까지 한다. 권력과 자본에 눌려 억압받는 계급의 프레임에서 관찰한 인간 모습만 묘사한다. ‘부조리-신음-저항’이라는 공식의 대변인으로서 정형화된 개인밖에 없다. 개인이 품는 다양한 생각과 관심, 삶의 의지를 싹 지워버리고, 오로지 정치 문맥 안에서만 사는 인간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다 보니 민중미술은 어둡고 칙칙하고 무겁고 색은 조악하고 거칠다. 이런 그림 앞에서 관객은 우울하고 지루하며 부담스럽다.
 
정치적 소통이 미술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중미술 운동가들이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부리는 반(反)예술적 억지 같아 보인다. 자신이 원하고 끌리는 느낌을 좇고 감성과 의미를 자유롭게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작가는 창조적 작품을 만든다. 관객은 그 창조적 노동과 능력에 감동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진정한 예술적 소통이 싹트는 토양이다. 하지만 사회 정치적 문맥에만 인간 존재를 가두고 인간 존재의 가슴 벅찬 예외와 멋진 간극을 배제하는 미술 담론이 미술계를 독점한다면, 미술을 찾는 애호가들 앞에 차갑고 높은 철창을 쌓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케이트 림(Kate Lim)은 미술 저술가이자 아트플랫폼아시아(Art Platform Asia) 대표로, 지난해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전시 ‘다섯 가지의 흰색-한국 5인의 작가’의 서문을 쓰고, 박서보의 영문 평전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2014)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 저술로는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2017), ‘Making Sense of Comparative Stories of Art: China, Korea, Japan’(출간예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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