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1.04 16:45
현 정부에서 민중미술이 ‘미술 권력’이 되고 있다. 2017년 말, 광화문 촛불 집회를 묘사한 임옥상 작가의 가로 16미터짜리 대작 ‘광장에, 서’가 청와대 본관에 걸렸다. 지난 2월, 민중미술의 대부(代父) 윤범모 씨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새로운 수장으로 취임했다. 윤 관장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과 함께 <현실과 발언>을 창립하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민중미술활동을 한 평론가 겸 큐레이터다. 윤 관장 취임 후 9월부터 열린 대규모 전시 <광장: 미술과 사회>는 미술관을 마치 민주화 투쟁과 촛불 집회가 있었던 ‘광장’ 같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 광장에는 민중미술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개념미술 작품들로 꽉 차 있다.

미술계에서는 1970년대 후반 민중미술이 등장하면서 ‘적폐’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민중미술 운동가들은 당시 주류였던 추상미술을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귀족적’이라며 청산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 개혁에 동참하는 미술만이 ‘참된’ 예술이라고 내세우며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재평가하는 미술 담론을 만들고 홍보해나갔다. 다른 예술 형태를 포용하는 공론화가 아니었다. 유신 정권과 결부된 과거 예술을 배격하는 정치 투쟁처럼 전개됐다. <광장> 전시가 ‘한국 근현대 100년 미술사의 새로운 해석’이라 천명한 것은 이러한 민중미술론을 국립미술관이 지배적 담론으로 확립해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색화의 거장(巨匠) 박서보 화백은 민중미술을 “회화가 아니라 삽화”라고 비판했다. 미술을 그 자체로 즐기는 회화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이야기책에 들어가는 ‘삽화’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평론가들의 얘기를 듣기보다 민중미술 작품을 직접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학철의 ‘모내기’라는 작품은 농부들이 철조망, 미사일, 탱크, 코카콜라, 람보 등이 엉킨 덩어리를 치우며 써레질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외세에 의해 뒤엉킨 한국 사회를 ‘민중’이 몰아내야 모내기를 한다는 스토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의 정신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했던 임옥상의 ‘광장에, 서’는 ‘박근혜 구속’ ‘닥치고 OUT’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약간 멀리에 청와대가 보인다. ‘촛불혁명’으로 새 시대가 열렸다는 뻔한 얘기다.
그러나 단색화의 거장(巨匠) 박서보 화백은 민중미술을 “회화가 아니라 삽화”라고 비판했다. 미술을 그 자체로 즐기는 회화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이야기책에 들어가는 ‘삽화’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평론가들의 얘기를 듣기보다 민중미술 작품을 직접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학철의 ‘모내기’라는 작품은 농부들이 철조망, 미사일, 탱크, 코카콜라, 람보 등이 엉킨 덩어리를 치우며 써레질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외세에 의해 뒤엉킨 한국 사회를 ‘민중’이 몰아내야 모내기를 한다는 스토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의 정신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했던 임옥상의 ‘광장에, 서’는 ‘박근혜 구속’ ‘닥치고 OUT’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약간 멀리에 청와대가 보인다. ‘촛불혁명’으로 새 시대가 열렸다는 뻔한 얘기다.
민중미술에 공통되는 것은 유아(幼兒)스러움이다. 아빠에 대해 그려보라고 하면, 어린아이는 아빠 같은 남자를 그리고 그 옆에 햄버거나 피자, 강아지, 축구공 따위를 그린다. “우리 아빠는 햄버거를 잘 사주고, 나랑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축구도 같이 한다”는 단순한 얘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초년병 화가들도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 색과 형태를 캔버스에 늘어놓고 그 상징에 담긴 생각과 느낌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륜을 쌓은 작가들은 이렇게 뻔한 직설적 표현의 단계를 넘어 함축적이고 다면적 표현에 천착한다. 젊었을 때 빈궁했던 피카소도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곧 큐비즘과 같이 그림이 던지는 메시지보다 그림 자체가 주는 시각적 다면성을 추구했다. 명화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무엇을 말할까’보다 ‘어떻게 그릴까’를 고민해 탄생시킨 창조적 방법들이 응축돼 있다.
미술 애호가들도 사실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림보다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고 다양한 연상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좋아한다. 이런 그림에는 특정하게 지시하는 메시지가 없다. 사회과학적 서술이나 신념의 부연설명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그림 자체의 매력이 있다. 민중미술은 애호가들이 ‘느끼는’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내뱉은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그림이다. 애호가 입장에서는 이렇게 메시지를 읽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굳이 그림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내용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글을 정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복잡한 사회현상에 대해 표피적 인식밖에 갖고 있지 못하는 미술작가가 어린애처럼 내놓은 메시지를 읽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중미술가들은 자신이 메시지를 던지려는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미술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정치사회 비평가의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국내 문화 평론계는 민중미술에 후한 점수를 준다. 오로지 사회 개혁에 동참한 미술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탄압과 검열 속에서 정치적 저항을 했다는 휘황찬란한 문맥에 취해서 평가할 뿐이다. 민중미술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용감하게 민중미술의 치명적 한계를 거론하는 것을 기피한다. 마치 자신이 정치적 탄압에 대해 눈감는 비민주적인 사람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향은 지금 민중미술 운동가들이 공적 미술기관의 전면에 나서면서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미술을 미술로서 만들어 내거나 즐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예술이 정치의 지시를 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정치적 이념의 강렬함이 좋은 작품 선정의 기준이 된다.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미적인 역량은 뒷전으로 밀린다.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미술관은 삽화를 늘어놓고 온갖 메시지를 낭독하는 ‘정치적 광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술적 소통은 무너지고 대부분의 미술 애호가들과 창조적 작가들은 그 광장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케이트 림(Kate Lim)은 미술 저술가이자 아트플랫폼아시아(Art Platform Asia) 대표로, 지난해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전시 ‘다섯 가지의 흰색-한국 5인의 작가’의 서문을 쓰고, 박서보의 영문 평전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2014)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 저술로는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2017), ‘Making Sense of Comparative Stories of Art: China, Korea, Japan’(출간예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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