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0.18 21:20
2018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
사진, 설치, 영상 등 다매체 통해 정치-미학 결합 이뤄내
국내 첫 개인전 ‘기계비전’, 2020년 2월 2일까지
라디오 송수신이 엄격하게 제한돼 있으며 인터넷 송수신은 불가능한 이곳.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45)은 미국 버지니아 서부의 깊은 숲에서 보름달에 길게 노출시켜 은밀한 그곳을 사진 <그들은 달을 바라본다>에 담아냈다. 어두운 암흑의 공간을 조정하는 군사기관의 보이지 않는 비밀전략과 그 흔적을 찾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전파 원격측정 시그널의 신호를 받아 그 신호가 공간을 탈출해 달에 부딪침으로써, 지구에 다시 반사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대규모 감시 시스템을 통해 트레버 페글렌은 인권을 위협하는 실험 혹은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에 숨겨진 운영체계를 기록하고자 했다.

2018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 트레버 페글렌의 국내 첫 개인전 <기계비전(Machine Visions)>이 2020년 2월 2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과학, 현대미술, 저널리즘을 융합하는 방대한 조사·연구를 뒷받침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그는 특히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기반으로 군사와 정보 조직의 비밀스러운 감시 장비를 암시적으로 노출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집중해왔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구축한 그의 작품세계는 사진, 영상, 설치, 조각 등을 통해 장르 구분 없이 펼쳐낸다. 예술가이자 지리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작업을 ‘디지털 세계의 숨겨진 풍경과 금지된 장소에 대한 지도’라고 명하고 비가시적인 국가 권력의 감시체계와 물리적 장치들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앞서 페글렌은 “탁월한 선구자이자 예술가 백남준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가르쳐줬으며 개인적으로 큰 영감을 받았다. 백남준과 연계해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 중 하나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실제 그는 예술상 제정 이래 최초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된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세계를 확장해 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로, 비디오와 사진, 설치 등 19점이 내걸린다. 타이틀 ‘기계비전’은 사람을 위해 이미지를 생성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계가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이미지를 생성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드론과 인공지능이 촬영하고 스스로 재생산한 이미지들, 감시체계인 위성과 이를 미학적으로 구축하려는 우주적 상상력, 보이지 않는 국가 감시체계를 시각화하는 페글렌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디지털 세계의 숨겨진 풍경과 금지된 장소에 대한 지도’라고 말한다. 고성능 옵틱스 망원렌즈를 사용하거나 스쿠버다이빙으로 100피트 깊이의 해저를 직접 탐사해 원거리 우주, 심연 풍경을 촬영한다. 군사기밀 기지, 감옥 등 숨겨진 장소, 또는 인공지능, 케이블, 스파이 인공위성 등, 디지털 세계의 데이터가 모여 있는 장소를 포착하면서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지점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지도를 재편집하는 것이다. <89곳의 풍경>에서 작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감시와 통신 시스템, 인터넷 연결망의 집결지(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런던)와 군사기밀 목적으로 설립된 정보국 건물 등을 카메라에 담고, 이러한 권력이 기반시설을 바탕으로 가능하게 됐음에 주목하며 내부에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권력시스템을 직시한다. 이외에도 설치 <작동하지 않는 위성>을 통해 우리가 상상해왔던 우주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인공위성 발사를 작가의 순수한 예술 작업으로 실현해 여전히 신비로운 우주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다.
페글렌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버클리대학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기밀, 사진 등을 주제로 책 5권을 썼으며, 2015년에는 촬영감독으로 참여한 <시티즌포>가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기도 했다. 2014년 전자 프론티어 재단에서 수여하는 파이어니어상, 2016년 독일 보스 포토그래피 재단에서 수여하는 상, 2017년 맥아더 펠로십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