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⑭] 백남준과의 ‘인연’과 ‘우연’을 추억하며

입력 : 2019.10.07 15:50
 
17일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필자와 백남준의 인연은 1983년 초여름 작업실을 방문해 인물사진을 촬영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1월 1일 뉴욕타임스에 그때 촬영한 그의 사진이 실린 이후, 백 선생이 필자의 사진을 치켜세워줬던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던 기억이다. 이후 그는 다른 사진도 보고 싶다고 하며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다시 작업실로 오라고 했다. 이후 여러 파티와 행사에 필자를 데리고 가 러셀 코너, 데이비드 로스 등 미술계 인사들에게 내 사진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백 선생은 밤늦게 전화를 자주 걸어오곤 했다. 밖에서 저녁을 먹다가도 밤이 깊어갈 때면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조건 집으로 돌아왔다. 필자가 백 선생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통화 내용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스튜디오 조수인 폴 게린이나 시케코의 근황 등 사소한 내용을 들려줬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당시 그는 당뇨가 심했다. 하루 17시간씩 과로하며 작업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매일 밤 10시가 되면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30분 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이제 와 추측해보건대 아마 주사를 맞을 동안 무료한 시간에 필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즐겨 쓰던 말 중 하나는 인연과 우연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연도 준비된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인연이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서로 연결되는 것인데, 백남준과 필자의 인연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대영박물관 등 국내외 미술계로부터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욱 많은 전시요청을 받고 있다. 필자 스스로도 그의 사후에야 중요성을 절감하며 그간 촬영한 사진과 편지, 드로잉 등의 자료를 정리하고 이에 관한 글을 쓸 기회도 더 많았던 듯하다.
 
1983년 초여름 뉴욕 소호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끝내고 나서는데, 백남준 선생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길거리까지 배웅해줬다. 인사를 나누고 떠날 때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한 장 더 찍고 싶다고 했더니 백 선생이 겸연쩍은 얼굴로 “안녕히 오세요”라고 답했다. ⓒ임영균
1983년 초여름 뉴욕 소호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끝내고 나서는데, 백남준 선생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길거리까지 배웅해줬다. 인사를 나누고 떠날 때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한 장 더 찍고 싶다고 했더니 백 선생이 겸연쩍은 얼굴로 “안녕히 오세요”라고 답했다. ⓒ임영균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전 세계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는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고 연구하며 전시하기 바쁘다. 오는 17일에는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막해 향후 3년간 유럽, 미국, 아시아 등지로 순회할 예정이다.
 
백남준은 예술가 이전에 과학자였고 발명가였으며 문화 인류학자였다. 또한 뉴-비전을 제시하는 사상가였다. 1964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오페라를 부르고 콩을 배설하며 걸어 다니는 <로봇K-456>을 제작해 많은 예술가와 관객에게 영감과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1970년에는 상업적인 TV 영상과 차별화되는 비디오 영상 <백-아베 신디사이즈>를 개발했다. 1995년에는 알래스카에서 하와이까지 포함한 미국 51개 주를 소재로 정보화 사회를 예측하는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프로그램밍된 비디오 연출을 주제로 개념예술전시를 열기도 했다.
 
과연 백남준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짐작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혹은 철두철미한 우연을 가장으로 전 세계를 누비는 선승이었던 걸까. 분명한 것은 백남준은 어느 누구보다도 확고한 한국인의 긍지를 가졌다는 것을 여러 번 드러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작곡한 첫 작품명을 <신라 향가>로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 문화를 섭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겼다. 
 
미망인 시케코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뉴욕 예술가들의 명소인 소호 머스 스트리트 110번지, 백남준과 시케코가 함께 살고 작업하던 그의 스튜디오는 이제 빈집이 됐다. 시케코가 유언으로 이곳을 ‘백남준 시케코 아트센터’를 만들어 달라고 가까운 사이였던 스미스소니언 큐레이터 존 헤르나트에게 부탁했다고 하니 빈집에서 아트센터로 탈바꿈해 모두에게 공개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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