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빠져나왔다. 이제는 당신이 들어갈 차례”

입력 : 2019.09.19 01:25

[이진우]
쇠솔질로 긁어내길 반복… “작품에서 내가 빠져나오니 ‘착한그림’ 돼”
조선일보미술관 기획전 ‘2019 Art Chosun on Stage Ⅳ’
<玄 : 깊다, 고요하다, 빛나다> 10월 2일 개막

 

 
피와 뼈와 살을 갈아 그림에 붙였다. 흡사 그러한 심정으로 하루 18시간씩 틀어박혀 작업했다. 일당 5만원어치였다. 당시 막일 인부의 일급을 참고해 잡은 자신만의 기준값이었다. 그렇게 매일 꼬박 한 달을 채워 작업한 그림은 한 점에 150만원 받고 팔았다. 신혼생활도 포기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완성한 그림이었다. “이 정도면 밥 먹을 자격 있겠다, 가슴에 손 얹고 최선을 다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더라. 남의 돈 절대 공짜로 받을 생각 없었다.” 재능과 실력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다른 이들은 쉽사리 제공할 수 없는 만큼의 노동량과 그 가치로 경쟁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작업을 성실한 노동으로 여기니 딴생각이 껴들 틈이 없다. 이렇게 매일 반복하며 하루하루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단순한 일상을 겸허히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파리=임영근 기자
“작업을 성실한 노동으로 여기니 딴생각이 껴들 틈이 없다. 이렇게 매일 반복하며 하루하루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단순한 일상을 겸허히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파리=임영근 기자
< Untitle(19-AC-29) > 279x420cm 캔버스에 한지, 혼합재료 2018~2019 /아트조선
< Untitle(19-AC-29) > 279x420cm 캔버스에 한지, 혼합재료 2018~2019 /아트조선
 
이진우(Lee JinWoo·60)는 머리 없이 오로지 몸으로 그린다. 교묘한 기술이나 잔꾀를 부리기는커녕 우악스러울 만큼 온몸을 냅다 내던질 뿐이다. 지름길도 샛길도 없다. 그는 잘 닦인 기존의 길을 마다하고 지난 30여 년간 홀로 고유의 길을 개척했다. 그렇게 미련할 만치 우직한 방식을 고수하며 거칠고 투박하게 걸어왔다. 고되고 지난한 그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술도 인스턴트로 뚝딱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그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여전히 한결같다. 이진우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그의 노동, 즉 몸으로 그려진다.
 
/아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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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란 작품으로써 말하는 법. 주절주절 말로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존재 자체로 이해되는 작품이라면 굳이 구구절절 무슨 해설이 필요할까. 장황한 말들 없이도 마주하고 있을 때 마음이 동한다면 이미 설명은 충분할진대. “내가 그렇다. 딱 봤을 때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거더라.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보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이후, 설명하지 않아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해답은 몸이었다. 몸을 던져 열과 성을 다해 만들면 이심전심으로 보는 이가 알아줄 거로 생각했다. 작업에 임하는 진실한 태도와 노동이 그대로 전해질 걸로 믿었다. 그가 작업을 고귀하고 성실한 노동이라 부르는 이유다. 실제 착수 전 목욕재계하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머리와 상념은 모두 비운다.
 
그의 사전에 대강 어물거린다거나 요령 피우는 법 따위는 없다. 팔, 손, 다리, 온몸에 범벅인 검댕은 곧 그가 묵묵히 홀로 걸어왔을 시간의 궤적과도 같다. /파리=임영근 기자
그의 사전에 대강 어물거린다거나 요령 피우는 법 따위는 없다. 팔, 손, 다리, 온몸에 범벅인 검댕은 곧 그가 묵묵히 홀로 걸어왔을 시간의 궤적과도 같다. /파리=임영근 기자
/파리=임영근 기자
/파리=임영근 기자
 
그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1983년 도불해 파리 8대학과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미술재료학을 공부했다. 미술재료학에 매료된 작가는 회화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천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데 있어 한지(韓紙)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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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위에 잘게 부순 숯 조각을 얹고 그 위에 한지를 겹겹이 발라 쇠솔질하기를 수십 번 반복한다. 쇠솔을 두드릴수록 숯 조각이 모여 이룬 돌밭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단순히 거친 표면을 평평하게 만든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끊임없이 버려내고 비워내기를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쇠솔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두드리고 긁어낼 때는 아무 생각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땀에도 순간의 노동 행위에 집중할 뿐이다.
 
이진우는 오가는 이들의 발에 닳고 닳아 가운데가 푹 파인 나무계단처럼, 수없이 거듭된 걸레질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한옥 대청마루에 눈길이 갔다. 단박에는 이룰 수 없고 오랜 시간과 노동이 꾸준히 축적돼야만 가능한 것에 끌렸다. 쇠솔로 문대고 또 문대서 정성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게 가시화된다면 자신의 화면도 나무계단과 대청마루처럼 얼마나 정겨워질까 생각이 들었단다. “이쯤 하면 됐다 싶을 때일수록 더 긁어내버린다. 멋있어지면 더더욱 긁어내야 한다는 반항심이 든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 작업하다 보면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때야 비로소 작품이 나온다.”
 
/파리=임영근 기자
/파리=임영근 기자
< Untitle(19-AC-17) > 55x73.5cm 캔버스에 한지, 혼합재료 2018~2019 /아트조선
< Untitle(19-AC-17) > 55x73.5cm 캔버스에 한지, 혼합재료 2018~2019 /아트조선
 
조선일보미술관 기획 ‘Art Chosun on Stage Ⅳ’ 이진우 개인전 <玄 : 깊다, 고요하다, 빛나다>가 10월 2일부터 20일까지 열린다. 2년 만에 국내에서 마련되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근작 29점이 내걸린다. 검은색은 품고 있는 색이 많기에 그 색을 온전히 담을 수 없고 이를 다 표현할 수 없기에 검은 것일 테다. 전시타이틀 ‘玄(검을 현)’에 ‘깊다, 고요하다, 빛나다’란 부제가 붙은 배경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꼭 산책하는 것 같다고들 그러더라. 몸을 쏟아내듯 작업하면서 내 체취는 빠져나왔기에 보는 이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이런 내 그림이 ‘착한그림’이 되어 세계평화에 기여하길 꿈꾼다.” 오프닝은 10월 2일 오후 4시.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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