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8.13 22:07
[인터뷰] 김혜진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혼(魂)과 색(色)의 작가’ 박생광
서민 대변하는 ‘무속’ ‘불교’ 소재로, 채색화 새 지평 연 불세출의 작가
15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 10월 20일까지 대구미술관
바야흐로 한국 근대미술 전성시대다. 국공립미술관부터 상업갤러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다퉈 내보이고 있고, 한국화랑협회는 지난 5월 문체부에 ‘한국근대미술관’ 설립을 건의하고 나선 상황이다. 지난달 한 미술품 옥션사에서는 미술 시장에서 저평가된 근대 작가들만을 아예 따로 모아 경매를 열어 전(全) 작품이 낙찰되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에 <아트조선>은 최근 국내 미술계에 불고 있는 근대미술 재조명 붐을 점검해보고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오방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채와 수묵, 채색을 혼합한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화단에 새로운 바람과 충격을 불러일으킨 박생광(1904~1985)은 생애 말 걸작을 남기며 한국 채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샤머니즘, 민족성, 불교 등을 소재로 우리네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성을 그림으로써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이뤄내기까지 역사의 격변과 함께 구도자적인 자세로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혼을 화폭에 쏟아부은 작가는 과거 없이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이는 미래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통감했다. 그렇기에 민족의 근간이 되는 역사와 전통을 소재로 삼아 화폭에 담아내고자 그리도 혼을 쏟았더랬다. 그중에서도 서민 문화를 대변하는 요소로 불교, 무속신앙에 주목했다. 종교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 뿌리내린 민족문화로 접근한 것이다.
2004년 박생광 탄생 100주년 회고전 이후 대대적으로 화업 전반을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10월 20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생광’ 전(展)은 작가의 작업 활동의 변모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최초의 자리로, 1930년대 작업부터 작고하기 전의 작업까지를 총망라한다. 최병식 경희대 미대 교수(미술평론가)는 “지금껏 박생광은 사후 몇 회의 개인전이 개최되는 정도에 그쳤을 뿐 본격적인 학술연구나 재조명이 미미했다. 최근 들어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재정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미술계의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대구미술관의 ‘박생광’ 전이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라고 했다. 이번 전시는 토속적인 한국성과 무속성을 반영한 박생광 특유의 작업을 되돌아보고 작가가 정립하고자 했던 한국 정체성이 담긴 회화가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박생광’ 전을 기획한 김혜진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생광을 혼(魂)과 색(色)의 작가”라고 설명했다. “전통과 모더니즘이라는 간극에 다리를 놓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주요 작가 중 하나로, 민족 미감을 담은 작품을 통해 한국 채색화의 발전에 일조했죠. 이것만으로도 박생광이 재조명돼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박생광이란 인물의 위치와 다시금 회자돼야 할 이유를 되짚어본다면.
“한국 20세기 미술 흐름의 격변을 견뎌낸 박생광은 한국 채색화의 흐름이 단절된 시기에 그 지평을 새로이 연 인물이다. 1980년대 들어서야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이미 1970년대 모노크롬이 대세이던 때부터 한국화 수묵운동이 있었고 채색화는 낄 자리가 없었다. 그런 배경에서도 박생광은 채색화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통해 한국인의 민족성과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민족성에 중점을 둔 정신성, 또한 직접적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민족미술에 영향을 줬다. 특히 ‘르 살롱전’(1985) 특별전에 출품해 ‘한국의 피카소’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채색화에 대한 국제적 평가는 국내 미술인들에게 채색화의 가능성과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처럼 민족 미감을 담은 작품을 통해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고 한국 채색화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후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데 일조했다. 이것만으로도 박생광이 미술사적으로 재조명돼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의 모노크롬이 대세를 이루던 1970년대에 박생광은 중심 화단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기법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역사의 단절의 비애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민족과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생전 그는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란 신념과 구도자적 자세로 작업에 임했고 70대에 들어서야 인정받았으니 꽤나 늦은 때 주목받은 것이다. 사실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느 정도 정립되고 나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 박생광은 그 나이에도 기존 기법을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구도자적 자세로 나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후두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
─출품작 일부는 강렬하고 기괴한 화풍, 특정 종교, 사상이 짙게 배어난다. 이에 대해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 기획자로서 해당 작가를 택한 데 부담은 없었나.
“무속적이거나 불교적인 작품은 특히 색채가 강렬하고 특정 사상에 편향된 것 같이 보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반 관람객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도 있었기에 좀 더 쉽고 친절한 전시가 될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했다. 때문에 기획의도, 연대표, 작가노트, 인터뷰 영상 등 전시를 다채롭게 구성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작가가 왜 무속적인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하는 데 중점을 뒀다. 관람객 반응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자주 상주했는데, 처음 우려했던 것과 달리 무섭다거나 싫어하는 반응은 크게 없어 일단 안심했다.”


─‘그대로’라는 한국식 호에서 작가의 작업 의식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그대로화풍’이란 무엇인가. 작가가 그토록 정립하고자 한 민족 정체성이 작품에 어떻게 드러났는가.
“기존에 ‘내고(乃古)’로 쓰던 호를 ‘그대로’로 바꾼 것인데, 박생광이 얼마나 민족성, 전통성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생광은 서민문화와 기층민을 대변할 수 있는 것들, 즉 토속성, 샤머니즘, 불교 등을 문화적으로 접근해 이를 한민족의 정체성으로 봤다. 토함산 해돋이, 탈, 단군, 십장생, 창, 불상, 목어, 부처, 단청, 부적, 무당, 무녀 등을 소재로 토속적, 불교적, 무속적인 요소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렸다. 민화에서 소재를 얻어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고 우리 역사에 깊이 자리한 불교를 소재로써 접근, 종교화가 아닌 문화로 바라봤다. 이들 모두 박생광에게는 기층문화를 대변하는 소재였던 셈이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구성에서 들끓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특히 전통 오방색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주제적인 측면과 마찬가지로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오방색으로 압도하는 에너지를 내뿜고 괴기스러울 정도로 환상적인 분위기와 방대한 스케일, 역동적 운율감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렇듯 색채의 자율성과 평면성, 주술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박생광의 전매특허다.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 주황색 선의 사용과 수묵과 채색을 혼합한 기법이 곧 독자적인 ‘그대로화풍’이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에 종종 눈동자가 빨간 인물, 혹은 동물이 그려지는데 이는 접신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연대별로 다양한 회화와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출품작이 160여 점에 이른다.
“전시 기획 초기에 작품을 200점 가까이 확보했지만 진위 검증 등의 과정을 거치며 솎아내 지금의 전시가 성사됐다. 미술관에서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으로 이뤄진 작품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진위 여부가 우려되는 작품을 1차적으로 걸러냈고 최종 162점이 출품됐다. 작가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주영갤러리를 비롯해 경남도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대여해왔다.
말년에 들어서야 토속적이며 무속적인 것에서 민족성을 발견한 후 박생광은 다작을 이어가는데, 그중에서도 역사적 사건에 집중해 역사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민족의 고통과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민족의식을 심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애초에 열 점으로 계획됐던 역사화 시리즈는 안타깝게도 후두암 병세가 악화돼 세 점에 그치게 됐다. 그 세 점이 <명성황후> <전봉준> <역사의 줄기>다. 역사화 시리즈를 대여해오려고 했지만 각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이영미술관 등과 최종 협의에 이르지 못해 안타깝게도 무산됐다.”
─회화만큼이나 드로잉이 상당수 내걸렸는데.
“지난 2004년 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전 이후 대규모 전시가 거의 없었다. 이전 전시들을 봐도 대부분 채색화 위주의 구성이었다. 이번 전시처럼 드로잉이 이렇게나 걸린 것은 최초다. 작가의 화력을 돌아보면 몇 번의 의미 있는 지점이 있었고 이를 기점으로 같은 작가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확연히 변모한 화풍을 보여줬다. 때문에 드로잉을 통해 화풍의 변화과정과 민족성을 나타낸 그림을 그리기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꾸몄다. 물론 드로잉 자체만으로도 박생광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시기별로 △유학 △모색 △실험 △독창적 화풍 정립 4가지 키워드로 나뉜다. 각 시기 특징과 다음 시기로 넘어갈 때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면.
“터닝 포인트라고 한다면, 근대 미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그러하듯이 시대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때 아니던가. 작가 역시 일제강점기, 전쟁, 민중운동 등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의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데, 이때가 바로 유학 시기다. 교토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동양화와 서양화를 배웠는데, 당시 일본 화단에서는 신일본화풍이 성행하고 있었다. 신일본화풍의 거장인 고쿠라 센깅의 제자가 된 박생광 역시 많은 영향을 받으며 ‘명랑미술전’, ‘대일미술전’ 등에 꾸준히 입선했다. 1930~1940년대 그의 작업은 일본 화단의 전위적인 경향에 따라 초현실주의적인 양식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해방을 앞둔 42세의 박생광은 귀국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국내 화단에는 일본화풍을 배척하는 척색주의가 완연했고, 이에 따라 작가는 중앙화단과는 다소 차단된 은둔 작업 활동을 이어가며 자연스레 모색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때 그는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 흔적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있으나 연속적인 작업량에 의한 일관성과 적극적인 모색이 결여돼 있어 이 시기를 방황기로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다. 일본화풍의 작업, 추상적이며 실험적인 작업, 수묵 위주의 작업 등 여러 화법이 혼재된 경향이 나타났고 이후 1967년 진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후부터는 한국 민속적 소재를 이용하며 화면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그의 실험적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업은 출품작 <이브2> <풍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험 시기인 이때의 작품을 보면 금박을 사용하거나 추상적인 형상을 그리는데, 기법적으로나 구도적으로 실험성을 추구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독창적 화풍 정립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양한 기법이 혼재하던 그의 작업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진화랑에서의 국내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박생광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미 195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그려 오고는 있었지만 1980년을 전후로 해서 본격적으로 한국적 이미지가 그의 작품 소재의 전반을 이루게 되며, 본격적으로 한국 민족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암 투병 중 사망해 결국 미완작으로 남은 <노적도>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1985년 후두암으로 타계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작품 속 피리 부는 노인은 박생광 자신을 나타낸다. 일종의 자화상이다. ‘노적도’는 피리 부는 노인이란 뜻이다. 미완이지만, 바탕에 먹이 스며들어 퍼진 것과 채색을 올린 단계를 밟아가다 보면 그의 작업 과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암 투병 중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작가는 이러한 고단함과 한스러움마저도 내려놓고 즐겁게 생을 마무리하겠다는 인생의 깨달음과 약간의 해학성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