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8.12 10:28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세계 최초 인공위성 쌍방향 생방송
1984년 1월 1일 일요일 저녁, 프랑스 국영방송 채널 3TV에서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공연이 방송됐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분할되더니 프랑스인 사회자가 나와서 대뜸 영어와 불어로 서로 인사말을 교환하고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백남준이 세계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해 기획한 쌍방향 소통 방식의 프로그램 <우주오페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이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9년 출간한 소설 <1984>의 내용에서 1984년 텔레비전 역할을 부정적으로 예측한 것을 빗대어,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긍정적인 소통의 수단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었다.
백남준은 1968년 미국에서 <전자 오페라 No. 1>을 미국 보스턴 WGBH-TV 요청으로 제작하면서 비디오 신디사이즈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일본 전자기술자 아베 슈야와 공동으로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방송물을 제작했다.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자 방송국의 요청으로 4시간짜리 <Video Commune>(1970) <Global Groove>(1973) <The Selling of New York>(1975) 등을 연속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이는 다른 비디오 작가와는 달리 시청자를 위한 폭넓은 접근방식이었다. 백남준의 말에 따르면 다른 비디오 작가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영상을 중요시한다고 했는데 반면, 그는 기존 방송국 채널을 활용해 일반 시청자의 안방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즐길 의무가 있다”
백남준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즐길 의무가 있다.” 바꿔 말하면 주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뜻도 된다. 급변하는 사회를 뒤틀림과 고고 댄서들의 재미를 뒤섞음으로써 재미와 의미 있는 메시지를 한 번에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인종차별적 폭언을 일삼는 미국 트럼프대통령을 비판하는 비디오 작품을 제작했으리라 상상해본다. 백남준의 관찰에 따르면 TV 테크놀로지는 방송제작진이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개발됐다고 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시청자가 텔레비전에서 보다 능동적인 관계를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역할을 오픈해 테크놀로지를 인간화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시대 개혁과 요구 인식한 비디오 작가
휘트니미술관장이었던 데이비드 로스는 백남준은 시대의 개혁과 가치의 요구를 인식한 최초의 작가라고 꼽았다. 1960년대부터 과학의 발달과 세계 정치적인 문제 등 시대의 변혁을 다른 어느 예술가보다도 빨리 직시했으며 그 변혁을 예술작업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독일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배우가 사회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흡사 백남준은 비디오 예술계의 브레히트 같다고도 말했다. 실제 백남준은 전자 미디어에 대해 수동적인 수용체계에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본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특히 백남준은 미래에는 전자 영상기술이 발달되면 누구나 영상 제작자가 될 수 있다고 1970년대 예측했었다. 오늘날은 누구나 휴대폰 카메라로 영상을 제작하고 유튜브에 올려 전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1980년대 중반 백남준이 내게 건넨 말이 생각난다. “언젠가는 개인 인공위성을 구입해 누구나 영상을 쌍방향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플랫폼을 만들어 개방하고 싶다.”
─파리에서 걸려온 전화
1984년 새해 첫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있었다. 그때 파리에서 백남준의 국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슨, 오늘자 ‘선데이 뉴욕타임즈’에 내가 촬영한 본인 얼굴 사진이 표지에 크게 실렸으니, 신문이 매진되기 전 빨리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잊지 말고 뉴욕타임즈에 고료를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로즈 박물관 등에서 내가 촬영한 백남준 인물사진을 영구 소장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공식적인 내 뉴욕 데뷔 작품이 됐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존경하는 백남준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었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진가가 나를 촬영했지만 임 군의 사진만큼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었다네!” 그와 전화 통화 후, 맨해튼 23가 코너 가판대에서 선데이 뉴욕타임즈를 구입했다. 아트판 표지에는 ‘미스터 오웰의 1984년 텔레비전의 역할을 반박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A Video Artist Nam June Paik Disputes Orwell’s 1984 Version of TV)’이란 머리기사와 함께 한 내가 촬영한 그의 인물사진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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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