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⑤] 백남준과 샤머니즘

입력 : 2019.08.05 09:39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TV 모니터와 아이디어 스케치
 
1983년 초여름의 어느 날, 뉴욕 소호의 백남준 작업실에서 사진 촬영을 하던 중, 불현 듯 지금 촬영하는 이 사진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역사에 남는 중요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할 때라, 아무리 훌륭한 사진을 찍더라도 현상 인화라는 화학적인 과정에서 실수하게 되면 작품을 망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연출의 사진을 두 롤에 따로 촬영했다. 그리고는 집에 오자마자 필름부터 현상해 이미지를 확인했다.
 
인물사진이란 촬영보다 사진을 촬영 전 피사체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고 특히 그 대상이 예술가인 경우에는 그의 작품에 관해 충분히 이해돼야 촬영 콘셉트를 만들기 쉽다. 이런 사전 준비가 없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사진에 그칠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촬영 대상과의 신뢰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촬영 대상은 낯섦과 어색함에 몸과 표정이 굳어 좋은 사진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촬영 전날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을 비디오 모니터와 어떻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 과정에서 수첩에다가 모니터 속에 있는 백남준과 모니터를 배경으로 얼굴을 클로즈업한 모습 등 세 종류의 구성안을 그려 놓았다. 때에 따라서 백남준 이미지를 모니터에 비춰 촬영하려고도 했다.
 
1983년 초여름 뉴욕 백남준 소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첫 번째 인물사진. 백남준은 뒷면의 모니터 설치 작품이 파리 퐁피두센터에 영구 소장됐다고 기뻐하며, 재인화해달라고 할 만큼 특히 이사진을 좋아했다. 1984년 ‘굿 모닝 미스터 오웰 쇼’를 미국 PBS 방송에 방영할 때 이 사진이 PBS 잡지 표지로도 사용됐다. ⓒ임영균
1983년 초여름 뉴욕 백남준 소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첫 번째 인물사진. 백남준은 뒷면의 모니터 설치 작품이 파리 퐁피두센터에 영구 소장됐다고 기뻐하며, 재인화해달라고 할 만큼 특히 이사진을 좋아했다. 1984년 ‘굿 모닝 미스터 오웰 쇼’를 미국 PBS 방송에 방영할 때 이 사진이 PBS 잡지 표지로도 사용됐다. ⓒ임영균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백남준과 대화를 나누며 최첨단의 전자기기를 사용하여 비디오 작품을 제작하는 그가 문화인류학, 그중에서도 특히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음을 알게 됐다. 대화를 마치고 나는 모니터 3개가 설치된 벽면을 배경으로 장소에서 촬영하자고 제안했고 조명을 설치하고 포즈를 주문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1인치 TV 모니터 3개가 적당한 간격으로 설치돼 있고 모니터에는 눈, 코, 입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각 모니터의 얼굴이 달랐는데, 맨 왼쪽 얼굴은 침을 흘리고 있었고, 중앙의 얼굴은 오른쪽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맨 오른쪽 모니터의 우측 하단에는 웬 마스킹 테이프 같은 것이 천 조각처럼 붙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촬영을 멈추고 그 마스킹 테이프를 제거하려고 했다. 백남준은 깜짝 놀라며 그것도 작품 일부이니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했다. 그 마스킹 테이프는 의도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부적처럼 부착해놓은 것이었다.
 
나는 문득 그 3개의 기이한 모니터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전 일본 동경 근교의 니꼬지(일광사)절에서 본 3개의 원숭이 표정과 이에 얽힌 가이드의 설명이 떠올랐다. 눈감은 원숭이와 입을 닫고 벙어리 흉내를 내는 원숭이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을 흉내 낸 모습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인데, 표정이 다른 것은 일본 전국시대에 무사가 양민을 이유 없이 살해하더라도 이를 못 본 척해야 하며, 슬픈 것을 보아도 절대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살 수 있었다는 얘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확인해 볼 수는 없으나, 백남준은 한때 일본 선불교에 심취해 선방에서 수련할 정도였으니 이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추측해본다.
 
─유년시절 일상이던 대감놀이 굿 행사
 
실제로 백남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하는 해프닝 예술은 샤머니즘 공연과 공통점이 있는데, 관객이 있어야 하며 공연 예술이란 점에서 즉흥성이 있다. 백남준은 평상시 본인이 스냅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겸연쩍은 표정을 짓곤 했는데, 아방가르드 퍼포먼스를 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얼굴이 달라져 과격할 정도로 돌변했다. 마치 박수무당이 접신 한 것처럼 말이다.
 
백남준은 유년시절 서울에 있을 때면 계절마다 집에서 굿을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 큰 방직공장을 경영했던 선친은 가업과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위해 대감놀이 굿 행사를 주기적으로 가졌다고 한다. 이 영향 탓으로 백남준의 드로잉에는 박수무당 애꾸가 자주 등장한다. 백남준은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다. 이후 독일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는 공연이 끝난 뒤 관객에게 여러 가지 소품을 나눠주곤 했다. 굿을 하고 나면 제사음식을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던 공동체 풍습을 재현한 것이다. 음식이 없을 때는 관객에게 물이나 콩을 뿌리기도 했는데, 이것도 일종의 샤머니즘에서 온 것 같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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