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7.31 20:25
[곽훈]
성공한 원로 재미화가, 다시 한번 세계로 도약 꿈꾼다
펄램갤러리, 뉴욕 아모리, 아트바젤 홍콩서 적극 홍보
작업실 방문해 직접 골라간 ‘할라이트’ ‘팔림세스트’ 연작 선봬

반백 년 화력(畵歷)의 서사를 들려주는 노장의 눈빛이 형형하다. 번득이는 그 두 눈만큼이나 필치는 과감하고 붓질에서는 기운이 넘친다. 작품 앞에서는 영원한 청년이다. 국내 화단에서 곽훈(78)은 성공한 재미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95년 김인겸, 전수천, 윤형근과 함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작가로도 익숙하다. 당시 전위적인 설치·퍼포먼스 <겁(劫)/소리: 마르코폴로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를 기획했는데, 50m 길이의 소나무 대에 북 형상을 한 도자기가 걸린 작품을 들쳐 멘 비구니들이 행렬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음악적 요소가 강한 이 제의(祭儀) 퍼포먼스는 비엔날레를 찾은 전 세계 미술인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1년 대구에서는 가로 6m, 세로 5m에 이르는 대형 천에다가 거대한 붓을 매단 포클레인을 직접 운전해 드로잉 퍼포먼스를 선보여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실험정신은 김구림, 김차섭 등과 함께 A.G.(Avant-Garde)를 창립하고 전위 미술 운동을 전개한 1960년대 후반 시작된 것인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渡美)해 국내에서 전위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진 못했지만, 대신 미국 미술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 안착했다. 로스앤젤리스, 시카고, 뉴욕 등지에서 선불교, 동양철학, 불교에 영향 받은 아시아적 정체성을 표현주의적 회화와 실험적인 설치작품으로 발표하며 다수의 개인전과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특히 당시 LA시립미술관(LA County Museum of Art)의 관장이었던 조신 이앙코(Josine Ianco)의 눈에 띄어 개인전을 가지며 미국 유수의 아트페어에 작품을 내걸면 팔리기 바쁜 인기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할라이트(Halaayt)>는 이누이트의 원시 고래잡이를 소재로,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걸고 고래 사냥을 하는 에스키모인과 그들에 맞서 사활을 걸고 싸우는 거대한 고래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누이트어로 영적(靈的)으로 트랜스 단계, 즉 무아지경에 이름을 뜻한다. 30년 전 미국 알래스카 여행길에서 고래 뼈를 마주친 이후로, 고래는 그의 평생 영감이 됐다. 원시의 고래 사냥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도 찾아가 망원경으로 보고 또 봤다. 이마저도 부족해 책을 사 와서는 집에서도 계속 들여다봤다. 이누이트족이 그러했듯 우리 선조도 고래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사실에 곽훈은 전율이 흘렀다. 가늠할 수도 없는 오래전 벽화지만 오밀조밀 그려진 그 형태에서 오늘날의 세련된 감성도 느껴졌단다. 지금까지도 그는 고래에 푹 빠져있다. 최근 몰두하고 있는 또 다른 연작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옛 경전을 재활용해 다시 쓰던 고대 이집트의 경전 ‘팔림세스트’에서 기인했다. 곽훈 특유의 대담한 문자 형상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듯 기운 충만한 강렬한 기세의 추상화면이 일견 직관적이고 즉흥적으로 내비칠 수 있지만, 이는 철저한 사전 공부와 수많은 연습을 바탕으로 실현된 결과물이다. <할라이트> 시리즈를 시작할 무렵에는 상상 속 고래를 실제처럼 구현하기 위해 드로잉만 수천 장 그렸고 이를 거듭하며 점차 현실성을 더해갔다. 단순하면서도 불분명한 그 형상에서 역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유다.


몸부림치듯 세차게 생동하는 고래를 담은 곽훈의 작품에 세계적 화랑인 펄램갤러리(Pearl Lam Galleries)가 주목하고 있다. 펄램갤러리는 2005년 중국 상하이에 현대미술전문 화랑을 설립한 이래 현재 홍콩 페더빌딩, H퀸즈, 상하이, 싱가포르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아시아 미술의 독자성과 우수함을 국제 미술시장에 전파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한국 작가에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김창열, 전광영 등을 미국, 유럽 등지에 소개해 세계 메이저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이들의 개인전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펄램 대표가 이번에 점찍은 이는 바로 곽 화백이다. 올해에만 경기 이천에 위치한 곽 화백의 작업실을 두 차례 방문했으며, 지난 3월 열린 뉴욕 아모리쇼와 아트바젤 홍콩에 연이어 곽훈의 작품을 들고 나가 호응을 얻었다. 모두 펄램 대표가 직접 골라간 회화로, <할라이트>와 <팔림세스트> 시리즈였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업세계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곽훈의 예술적 본령은 회화에 있다. 형식으로는 추상 화풍을 취하지만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다룬다. 일제강점의 말기와 6.25동란의 혹독한 전쟁 체험을 유년기의 추억으로 간직한 그가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투사하는 데서 비롯됐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칠하고, 긁고, 입히고, 닦아내는 그 특유의 표현 방법론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러한 체험과 관련이 깊다.”
2016년과 2019년 곽훈의 초대전을 개최한 이지원 피앤씨갤러리 대표는 “곽훈은 백남준, 김수자, 양해규, 서도호와 같이 해외에서 한국인 특유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서양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혹은 ‘코리안 샤먼’의 1세대 작가로서, 세계미술 속의 한국미술사를 정립할 때 반드시 언급돼야 할 작가”라고 설명했다. 수십 년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이후 국내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그가 다시 한번 세계 미술시장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곽훈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