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6.12 19:35
[인터뷰] 박서보
“연필 쥘 힘 남아 있을 때까지 그리겠다”
대표작 ‘컬러 묘법’ 중단하고 ‘연필 묘법’으로 변화
미공개 신작 포함해 회화, 아카이브 등 129점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展, 9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까지만 해도 박서보(88) 화백은 조수를 여럿 두고 작업했었다. 무화(無化)하고 비워내기 위해 오히려 조수가 많을수록 더 좋다고도 했었다. 60대 중반 무렵 심근경색, 10년 전엔 뇌경색을 겪고 난 뒤부터 한쪽 팔다리 사용이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남의 손을 빌리기 시작한 건데, 이 ‘남의 손’이란 게 작품에 근본적인 개입을 하는 건 아니었다. 박 화백의 작업 특성상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남의 손을 도구로 삼아 중첩하며 손맛을 쌓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성을 억제하고 무명(無名)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조수가 다 한다’는 빈정거림은 그를 향한 오랜 비판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구순을 앞둔 노화백이 자기 말마따나 다시 한번 변화했다. 조수들을 내보내고 지팡이를 짚은 채 발을 끌면서도 홀로 이젤 앞에 서길 택했다. 남의 손을 빌려 내던 손맛은 이젠 연필을 쥔 그의 손이 내고 있다. 그림이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지만 작가의 신체조건에 따라서도 변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연필 한 자루이지만 수개월 걸려 완성해낸 화면은 지난 70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밀도감 있고 만족스럽다고 자신했다.
평론가, 행정가, 교육자이자 단색화 열풍의 주역인 박서보의 대규모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9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1950년대 작업 초기작부터 2019년 완성한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회화, 판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29점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업세계를 한눈에 조망한다. 서울 연희동의 작업실 ‘기지(GIZI)’에서 그를 만났다.

◇지칠 줄 모르는 아흔 살 수행자
─1950년대부터 최신작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소감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을 텐데, 나 역시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싹 다 드러낸 전시다.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다.”
─감추고 싶었던 것이라면?
“1960년대 유전질 시기 작품이 부끄러웠다. 오방색의 색동, 등덮개, 색띠 등이 그림 요소가 된 건데, 당시 유신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군사정부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울 때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 변화 흐름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시기가 부끄러웠지만, 막상 (작품을) 걸어놓고 보니 한 시대의 양식적인 걸 도입했다할지라도 그게 그렇게 서툴지만은 않았다 자평하고 싶다. 수영복을 입은 여성을 그린 <비키니 스타일의 여인>(1968)은 지금 시각으로도 대단히 팝적이지 않나.”
─2019년 신작이 최초 공개됐다. 언뜻 초창기 연필 묘법이 떠오른다. 회귀한 것인지.
“연필 신작은 오롯이 혼자 하는 일로 돌아가겠다, 나 혼자 끄적이다가 떠나겠다는 결심의 표출이다. 그림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작가 신체조건에 따라서도 변한다. 신작 두 점 완성하는 데 꼬박 4개월 넘게 걸렸다. 누울 수도 엎드릴 수도 없이 주구장창 서서 그려대니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가 땔나무처럼 뻣뻣하다. 작업 시작하면 하루에 8시간씩은 임하니 다리가 오죽 아프겠나.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이젤 높낮이 조정하며 시점은 고성시킨 채 연필질을 수만 번 반복한다. 젊어선 호흡에 강약을 줘가며 리드미컬하게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출렁 한 번에도 넘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젠 연필 한 자루 쥐고 홀로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작업한다. 초기 연필 묘법엔 컬러를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일로 색을 만들어 연하게 배경색을 입히고 연필도 연하게 끄적인다. 대신 밀도감은 훨씬 더 높아졌다.
페로탕, 화이트큐브에서 연필 신작들만 갖고 전시하자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일 년 동안 다섯 점, 많아야 열 점 완성할까말까다. 그랬더니 페로탱에서는 다섯 점만 갖고도 할 수 있다고, 파리에서 한 전시실 당 한 점씩만 걸어서 하자더라. 신작은 1000만달러 줘도 안 팔 거다.”

─초창기 연필 묘법에서 거듭된 선긋기를 통한 수신(修身) 개념이 비롯된 것인데, 당시 세 살짜리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착안했다고 들었다.
“서양회화와 이론을 뒤쫓기 급급한 나 자신을 매질하며 ‘박서보, 넌 누구냐’를 끊임없이 자문할 때였다. 답을 찾으려 불경, 노자 등 안 읽은 게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놈이 자기 형 방안지 공책에다 ‘한국’을 쓴답시고 작은 칸 속에 글자를 집어넣고 있더라. 한 칸에는 ‘ㅎ’을, 한 칸에는 ‘ㅏ’을 넣는 식이었다. 연필 잡는 법이 설어 자기가 봐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써놓고도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종이가 찢어지니 짜증이 솟구치는지 막 찌그려버리더라. 포기한 거다. 그때 무릎을 쳤다. 아, 저게 바로 체념의 미학이구나! 칸 속에 꾸역꾸역 글자를 넣으려는 것은 목적성이다. 그건 서양의 것이다. 행위가 목적성을 가져선 안 된다. 비워내야 한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이 어디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삶 속에 널려 있었다.”
─연필 묘법이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작업을 연상한다는 지적이 이번 회고전을 계기로 다시 부상했는데.
“세잔, 고흐, 르누아르 모두 정물을 유화로 그렸다. 그렇다고 이들 셋을 두고 서로 닮았다고 하던가. 연필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톰블리는 연필로 지체 없이 단숨에 즉흥적으로 그려냈다. 반면, 나는 연필질을 수없이 반복하며 그린 것 위에 그리고, 또 그리기를 거듭했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똑같다고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연필로 끄적인 것만 두고 똑같다고 하는 게 우리나라 수준인지 심히 아쉽다.”

◇거품 빠진 단색화? “지금은 숨 고르는 중”
─단색화 열풍을 이끈 주인공이다. 줄곧 강조해온 단색화의 수신, 정신성과 같은 개념은 서양 미술계에는 다소 낯섦에도, 단색화에 매료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단색화의 기본정신은 무목적성과 반복성이다. 스님이 쉼 없이 목탁 두드리며 선에 도달하듯이, 화면에 끊임없는 반복성을 드러내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그리는 행위는 수행 과정이고, 이는 곧 수신 개념이다. 그래서 그림이란 수신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여기저기 밀리며 물성이 만들어지고 무목적성과 반복성, 이 두 가지 요소와 어우러지며 정신성을 이룬다. 이게 바로 단색화다. 서양 애들은 철저히 목적성을 지닌다. 자기네들한테 없는 거니까, 자기 미술사엔 없는 걸 우리가 하니까 좋아하는 거다.”
─단색화의 정신성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북한산에 있는 진관사를 간 적이 있다. 저녁 6시가 되니 타종을 한다기에 스님들을 따라갔다. 종은 스님들이 치는 거고, 우린 뒤에서 당목에 달린 끈만 잡고 있었다. 당목이 종을 때리는 타종의 순간, 울림과 진동이 그 끈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설명하기 힘든 전율에 발끝까지 몸서리쳤다.
우리나라 전통과 정서는 인간의 세상을 떠나 시작되는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 시작되는 세계를 추구했다. 이를테면 서양의 바이올린은 연주자가 손을 떼면 소리가 멈추지만, 가야금은 튕기고 손이 멀어질 때야 소리가 울린다. 당목이 때리고 물러설 때 종소리가 울리는 것과 같다. 당목의 끝이 바로 인간의 세계인 셈이다. 승무(僧舞)도 마찬가지다. 서양 춤은 멈추면 그걸로 끝이지만 승무는 동작을 멈춘 뒤에도 긴 장삼이 공중을 휘감으며 핵심을 드러낸다. 이러한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게 단색화의 정신성이다. 서양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우리는 반대로 인간의 손을 벗어나 시작되는 세계를 바라본다. 나 역시 그쪽으로 가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다.”
─단순히 한국식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이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는데.
“미니멀리즘은 수신의 도구로써 그림을 택한 것이 아니다. 미니멀 아트라는 건 의도적으로 최소화하고 최소한의 표현을 하는 것이지, 아예 무(無)로 돌리는 게 아니다. 단색화의 비워내는 개념은 서양미술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이다. 자기네들한테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거다. 그게 아니었으면 또 자기들 흉내 낸 거라며 코웃음 치고 끝났다.”
─단색화가 하나의 유행이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불타올랐다가 한계를 드러내고 불씨가 꺼져가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단색화 열풍이 시들해져 간다고들 하는데 내가 볼 땐 지금 숨 고르기 하는 거다, 숨 고르기. 수요에 맞는 공급량이 부족한 상황이다. 대줄 물건이 없는 거지. 게다가 단색화가 잘 팔리니까 빨리 수급하려고 급하게 작업하는 무늬만 단색화 작가들이 속출하는 현상도 문제다. 껌을 무작정 잡아당기면 얇아지다가 결국 끊어지기 마련이다. 멀리 길게 내다봐야 한다.”

◇“부끄럽지 않으려고 변화한다”
─지난해 돌연 더는 기존 묘법 작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컬러 묘법이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인데 그만둔 데 후회는 없는지.
“더 가다간 하나의 양식화 속에 나 자신이 함몰되겠더라. 그게 바로 위기지.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란 예견이 들어 컬러작업을 그만뒀다. 조수들을 다 내보내고 양산 체재를 중단했다. 끄적끄적하며 홀로 작업하겠다는 거다. 1년 동안 고작 다섯 점 그리더라도 그게 최선이니까. 박서보가 가기 전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인생 마감하고 싶다.”
─죽음을 자주 언급한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건 명백한 사실 아니겠나. 아무렇지 않다. 그저 훗날 죽어서도 부끄럽지 않은 화가로 남기 위해 다가올 그때를 준비할 뿐이다. 미리 정리해놓지 않고 별안간 꼴깍하면 가족들이 당황할 테니… 이곳(기지)은 나 죽고 나면 기념관 겸 미술관으로 운영할 거다. 현재 작업실로 쓰는 2층도 전시실로 만들라고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지은 곳이니까. 나 묻힐 곳도 이미 다 봐뒀다. 서울과 가깝고 볕이 온화하게 내리쬐는 곳이다.”
─홍대 서양화과 재학 당시 교수였던 김환기 화백이 “이 자식 천재네”라고 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김 화백에게 인정받은 것처럼 본인이 인정하는 제자나 후배가 있다면.
“자기 관리는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다. 자기 작업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말년이 중요하다. 기가 쇠한 걸 모르고 자꾸 겉모양만 그럴싸하게 해서 눈속임한다든지. 대부분 그렇게 되더라. 위대한 예술가라면 시대를 꿰뚫어 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