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찌꺼기 속 마주한 白骨의 환시… “내 현실이자 미래였다”

입력 : 2019.05.22 16:04

안창홍, 자신의 삶 빗대어 소시민 삶을 이야기하는
‘화가의 손’ ‘화가의 심장’ 등 부조 신작 공개
6월 30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작업실에 물감 찌꺼기를 따로 모아두는데, 어느 날 문득 그 통 안에서 백골을 봤다. 그건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다.” 7년 전, 물감 찌꺼기가 가득 찬 쓰레기통에서 안창홍(66)은 백골을 마주했다. 헛것이었다. 그러나 그 환시에서 작가는 자아를 발견했다. 작업이 얼마나 고되면 환각에 사로잡히나 하는 푸념이 들었지만 백골이 될지언정 끝까지 작업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죽더라도 화가로서 죽겠다’식의 결심. 백골은 작가에게 환각이면서 현실이자 미래였다.
 
<화가의 손 1> 300x220x45(d)cm Acrylic on FRP 2019 /아트조선
<화가의 손 1> 300x220x45(d)cm Acrylic on FRP 2019 /아트조선
<화가의 손 4> 184x130x29cm(d) Genuine Gold Leaf on FRP 2019 /아라리오갤러리
<화가의 손 4> 184x130x29cm(d) Genuine Gold Leaf on FRP 2019 /아라리오갤러리
 
안창홍은 7년 전 경험한 환각을 묵혀뒀다가 오늘날에서야 소재로 꺼내 들었다. “큰 작업을 하려면 여건이 뒷받침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작은 제작에 시간은 물론 비용도 상당히 든다. 이전 작품들 팔아 번 돈을 이번 작업에 고스란히 쏟았다. 술값만 빼고(웃음).”
 
신작 부조 연작 <화가의 손>은 화가 안창홍의 정신성을 담은 것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화가의 인생, 더불어 소시민의 고단한 인생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꼭지가 떨어진 조화나 몽당붓, 나이프부터 인형, 롤러, 끝까지 다 짜낸 물감 튜브 따위가 빽빽이 뒤엉켜 있고 그 중앙에는 백골의 손이 걸려 있다. 제목 속의 ‘화가’는 작가 자신임과 동시에 굴곡진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을 대변하는 존재다.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워진 삶의 굴레를, 작업의 치열함 속에서 시간과 운에 의해 성패가 갈리고 희비가 엇갈리는 화가의 삶에 빗대어 원본을 확대해 캐스팅한 형형색색의 작업, 금박을 입힌 황금빛깔과 잿물을 입힌 잿빛의 작업을 걸었다. 크기는 높이 3m 가로 길이 2.2m에 달한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시선과 비판적 사유를 담은 평면 작업으로 잘 알려진 작가는 2016년부터 입체로 매체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평면과는 시각적으로 전혀 다른 맛이 있어 빠지게 됐단다. “부조는 일종의 입체 회화 같은 거다. 육체적 노동은 회화에 비하면 곱절은 더 든다. 그러나 그만큼 보는 이에게 전달되는 감동도 배가 된다고 믿는다.” 이번 부조 신작도 노동집약적이다. 그는 이 지난한 과정이 포함되지 않으면 작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신작 <화가의 심장> 앞에 선 안창홍. 삶의 가치가 고통과 아픔에 기반하며, 나아가 이 고통과 아픔이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음을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아트조선
신작 <화가의 심장> 앞에 선 안창홍. 삶의 가치가 고통과 아픔에 기반하며, 나아가 이 고통과 아픔이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음을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아트조선
 
또 다른 신작 <화가의 심장>은 가시에 둘러싸인 채 고통스럽게 피 흘리는 선홍색 심장을 표현했다. 삶의 가치가 고통과 아픔에 기반하며 나아가 이 고통과 아픔이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냈다. “실제 심장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교과서적 형태를 본뜬 것뿐이다. 심장이란 그 상징성이 중요하지 사실적 디테일에 몰두하는 것을 지양한다.”
 
<이름도 없는…>은 익명의 얼굴을 그린 소품 연작이다. 몰개성화된 얼굴들이 거친 붓터치로 그려져 있다. 표정 없는 얼굴들은 제목처럼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닌, 존재 자체가 묻힌 익명의 인물들이다. 특징이 제거된 얼굴에 제주 4.3사태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역사의 현장에서 희생당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현실을 투영했다. “이유 없이 혹은 이유도 모른 채, 공권력에 의해 죽임당하고 잊혀간 이들을 그렸다.”
 
<이름도 없는… 2018-3> 38x38cm Oil on Canvas 2018
<이름도 없는… 2018-3> 38x38cm Oil on Canvas 2018
<이름도 없는… 2019-3> 38x38cm Oil on Canvas 2019 /아라리오갤러리
<이름도 없는… 2019-3> 38x38cm Oil on Canvas 2019 /아라리오갤러리
 
작가는 산업화 사회에서 와해된 가족사를 다룬 <가족사진> (1979~1980), 눈을 감은 인물 사진 위에 그림을 덧그려 역사 속 개인의 비극을 나타낸 <49인의 명상>(2004),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건강한 소시민의 누드를 그린 <베드 카우치>(2009) 등 다채로운 연작을 선보였다. 그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적자생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인물과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시선이 자리한다.
 
이 같은 주제의식과 1980년대 ‘현실과 발언’ 활동 이력으로 인해 흔히 그를 민중미술작가로 기억하지만, 자신의 예술이 ‘현실주의’나 ‘삶의 미술’에 가깝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과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내 더듬이는 사회의 그늘진 곳에 향해있다.” 6월 30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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