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만유의 근원이었을지 모를 한 점(點)에서 비롯됐다

입력 : 2019.03.26 17:25

[인터뷰] 김태혁 작가
조선일보미술관 기획전 ‘2019 Art Chosun On Stage Ι’
‘네트워크 아트’展, 4월 19일 개막
낚싯줄 위에 걸린 물감덩이 ‘오프 시리즈’,
물감으로 엷게 메운 그물망 ‘플레인 시리즈’ 등 출품
 

 
 
낚싯줄이 얼키설키 얽혀 그리드를 빚고 그 종횡선의 접점마다 물감덩이가 앉아 교차점을 시각화하는 표식으로 작동된다. 김태혁(54)의 화면을 완성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점(點). “태초에 만물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인간 역시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고 우주의 모든 것은 점에서 비롯됐을 거란 이야기말예요. 시간이 흐르며 점은 점진적으로 팽창하며 성장했을 거고 그 과정에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며 선이 되고 면이 됐을 거라고…”
 
작가의 말마따나 세상이 그러했듯 스스로의 작업도 점에서 태동해 확장됐다. 만유의 근원이었을지 모를 한 점을 구현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바탕지에서 분리돼 오롯이 존재해야만 했다. 그래서 작가는 격자무늬로 엮은 낚싯줄 위에 작은 물감덩이를 얹어 3차원적 화면을 구현했다. 2014년 시작된 연작 <오프(OFF)>는 멀찌감치 보면 물감덩이들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실상 수지선(樹脂線) 위에 물감이 올라가 있지만 줄이 투명한 까닭에 작은 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점이 내려앉은 투명 수지선이 옅은 바람결에 살아있는 듯 일렁인다.
 
< OFF-D-L 160801210312 > 120x95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6, < OFF-D-L 170816172915 > 117x91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7 /아트조선
< OFF-D-L 160801210312 > 120x95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6, < OFF-D-L 170816172915 > 117x91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7 /아트조선
 
김태혁은 매체로서 물감의 속성과 의미 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조형실험에 10년 이상 천착해오며 도전적인 시도를 마다 않고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해왔다. 전통적인 개념의 회화에서는 캔버스가 지지체 역할을 하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이를 벗어나 좀 더 실험적인 조형성을 실현할 방법을 모색했다. 고민을 해결해준 건 거미줄이었다. “화단을 걷는데 허공에 희끄무레한 뭔가가 떠있는 거 아니겠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가지에 얽힌 거미줄 위에 담뱃재가 떨어져 있는 거더라고요. 거미줄에 걸려 있으니 얼핏 봤을 땐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 거였어요. 이때 무릎을 탁 쳤죠. 이거다.” 지지체인 듯, 그러나 완전한 지지체는 채 되지 못한 그물망이 일견 거미줄처럼 보인 이유다.
 
4월 19일 조선일보미술관에서의 개인전 개막을 앞둔 김태혁 작가가 시그니처 작업인 ‘오프’ 시리즈 앞에 서 활짝 웃어보였다. /임영근 기자
4월 19일 조선일보미술관에서의 개인전 개막을 앞둔 김태혁 작가가 시그니처 작업인 ‘오프’ 시리즈 앞에 서 활짝 웃어보였다. /임영근 기자
 
독특한 작업물인 만큼 제작 과정도 녹록지 않다. 먼저 낚싯줄을 팽팽하게 늘려 고정하는데 너무 세게 당기면 늘어나 나중에 헐렁해질 수 있으니 적정한 힘을 가해야 한다. 이렇게 수십 줄을 교차해 엮은 뒤엔 접점마다 주사기로 물감을 쏜다. 피스톤을 밀어낼 때 역시 힘 조절이 관건이다. 고도의 집중과 섬세함을 요하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들어선 시력도 나빠진 것 같단다. 작업할 때 화면에 바짝 붙어 가까이 있는 물체를 오랜 시간 바라본 탓이다. “변화해야할 때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해요. 신체 변화가 일만큼 같은 작업을 지속했다는 뜻이고 이를 마냥 지속하기보단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라는 거죠.”
 
그래서 2016년부터는 <오프>의 스핀오프인 <플레인(Plane)> 시리즈를 병행해 내보이고 있다. 중앙대 서양화과 출신이면서 정작 붓질할 일이 없던 기존 작품에서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투명수지선의 격자무늬 픽셀을 얇은 물감으로 채우는 기법을 개발해 붓질이라는 회화의 본질적 행위를 다시금 회복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 작가는 낚싯줄을 바탕지 삼아 그리드 전면을 물감으로 엷게 메운다.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는데 김태혁 또한 이 궤적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 OFF-P 181209113207 > 119x194.4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8 /아트조선
< OFF-P 181209113207 > 119x194.4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8 /아트조선
 
작가가 점·선·면이 서로 조응하는 신작을 들고 오랜만에 전시장 나들이를 나선다. 4월 개막하는 초대전 ‘네트워크 아트(Network Art)’에서 화면 위에 펼쳐진 그물망, 즉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오프와 페이스 시리즈 등 신작 30여 점을 포함해 점을 확대한 형상의 최신 설치작업 <매스(Mass)>를 내건다. 하나의 서사처럼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이들 작품을 통해 김태혁의 무한한 작업 확장력을 가늠할 수 있다. 4월 19일부터 28일까지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리며 오프닝은 19일 오후 5시.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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