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2.27 11:27
[인터뷰] 김근태 작가
“내 그림은 포용의 미학… 감싸 안아 포옹하고자”
수행하듯 반복하는 덧칠… 정신성과 시간성이 켜켜이 축적된 화면
‘한국현대미술작가’展, 3월 27일부터 주홍콩한국문화원

고요하리만큼 정적인 백색(白色) 화면, 그 새하얀 적막을 비집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거친 표면이다. 붓질의 흔적은 일면 살리고 수 십 번 반복한 덧칠에 켜켜이 쌓인 물감층은 그 더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궤적을 최소화한다. 그 와중에 비죽 삐져나온 검정 자취가 설원(雪原)의 정적을 깰 뿐이다.
김근태(66)는 지움과 절제를 통해 궁극의 비움을 그려내지만 그의 화면은 어떠한 경지보다도 묵직하고 그득하다. 그는 단색 물감을 바르고 말리고 또 바르기를 거듭하며 동시에 마음은 비워내는 수행적인 태도를 일관해왔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에 관한 답으로 향해가는 수도와도 같으리라.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선(禪) 수행하듯이 무형의 정신적인 세계를 탐색하며 화업을 이어왔다.

희거나 검은 무채색을 고집하고 가끔 물감에 돌가루를 섞는 게 변주라면 변주다. 그의 그림에는 화려한 색채도 없지만 틀이나 격식도 없다. 붓을 든 순간의 심상이 화면에 담길 뿐이다. “일정한 형식에 한정해 작업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애써 조작하는 것은 제 성정(性情)과 맞지 않죠. 매사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레 두고 싶어요. 누군가는 둑을 쌓아 흘러가는 물길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어째선지 저는 자연에 순응하고 싶달 까요.” 자연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순종적인 자세에서 백색 화면의 공허함은 충만함으로, 텅 빔은 그득함으로 전복된다.
김근태의 ‘화이트 시리즈’는 흡사 조선백자의 빛깔을 연상하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은은하게 드러나는 시간의 미학은 백자를 만들던 선조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비어있는 상태, 그러나 공허하지 않은 비움의 세계, 근원을 건드리고 표출하는 정신의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덧칠을 수십 번 반복한다. 그는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비물질적인 정신세계를 물질화하고 나아가 물아일체에 이른다. 작가가 걸어온 시간과 살아온 삶, 가치관이 오롯이 그리고 켜켜이 쌓여 백색 화면 밖으로 침윤한다.

한국적 아름다움과 고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삼은 계기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호주 현대미술교환전’이 열린 오스트리아 폴텐에서 그간 책에서만 보던 렘브란트의 그림을 직접 대면한 순간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작품 한 점에서 시간성과 사유의 축적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때껏 내가 그린 건 예술이 아니라 모방에 불과하다고 깨달았어요. 뭣도 모르고 흉내만 내고 있었구나. 이래 갖곤 답이 있겠나…”
충격의 터닝 포인트 이후 그는 4년간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 과도기를 관통하며 여러 시도를 해보거나 화풍이 들쑥날쑥하기도 했다. 갈피를 잡은 것은 경주에서였다. 칠불암, 석굴암의 불상 앞에서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오래된 건축과 빛바랜 벽, 석탑의 거슬거슬한 색감, 미륵의 웃음에 길이 있었다. “서양미술과는 아예 다른 우리 고유의 길을 알아챈 순간이었죠. 본디 내 DNA에 내재해 있는 걸 모르고 멀리 돌아왔어요.” 그가 돌가루를 섞어 쓰는 이유다. 흰색이지만 희지만은 않으며 누렇지도 않은 색, 과시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으며 은근히 배어나는 미색을 실현하기엔 돌가루가 제격이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질박한 표면, 소박한 문양이 그의 화면에 홀연히 녹아든다.

흑색 그림은 작가의 또 다른 시그니처 연작. ‘블랙 시리즈’는 가족 걱정에 여념 없던 어머니의 간절함에 대한 오마주다. “저 어릴 적, 어머니는 시루 한가득 떡을 쪄서는 상에 올리곤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되뇌셨어요.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알죠.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시루떡에 투영돼 있었다는 걸.” 짙은 암흑의 화면은 떡을 찌던 시루의 쥐색 빛깔에서 왔다.
김근태는 3월 27일부터 주홍콩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작가’전(展)에 참가해 화이트 시리즈와 블랙 시리즈 10여 점을 내건다. 거창한 남발 없이 담박한 그림이 분란한 현대인의 삶을 향해 나직이 미소 지으며 위로를 건넨다. “내보일 것도, 감출 것도 없는 태연무심한 그 자체가 제 그림이에요. 세상사에 치여 지치고 피곤한 심신을 제 그림으로 정화해보세요.” (02)724-7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