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의 만년 화두 ‘동시성’, 뉴욕과 홍콩 동시 입성하다

입력 : 2019.01.15 21:47

2월 뉴욕, 3월 홍콩 등 잇따른 해외 전시 소식
50년도 모자란 ‘평생주제’ 두고 끊임없는 변화 모색…
차가운 기하추상에서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따스한 화면으로의 변모
 

오는 2월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개인전을 앞둔 서승원 화백. /아트조선
소년은 매일 밤 미색의 문풍지에 그윽하게 배어나는 달빛을 보며 잠들었다. 문창살 사이사이로 문풍지가 달빛을 뱉어내는 그 광경은 봐도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관찰력으로 사소한 것도 남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하나에 빠지면 푹 파고들어 끈질기게 끝장을 보고야 마는 뚝심 있는 소년. 서승원(78)은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 성격이 지금도 어디 갔으랴.
 
그는 반백 년 넘는 시간을 오로지 한 주제 ‘동시성(Simultaneity)’에 매달리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천착하는 그 동시성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50년을 쏟아부어도 부족한 평생 화두가 된 것일까. “형태와 색채와 공간, 이 세 요소가 등가(等價)로서 하나의 평면 위에 동시에 어울린다는 뜻이죠. 이 모든 게 함께 어우러지는 감성적 예술세계라고나 할까요. 이를 통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아울러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달빛이 창호지를 적시며 스며 나오듯 한번 정제되고 탈색된 색은 동시성의 정체성을 이루는 바탕이자 평생 골몰할 수 있게 한 동인(動因)이었다. 보일 듯하지만 결국 뚜렷이 보이지 않는 그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동시성 시리즈를 여태껏 고수하게 됐다. 이는 그가 화면을 구성하는 밑칠 작업에 공을 들이는 것과 같은 이유다. 흰색을 거듭 칠하며 그림의 바탕을 다지는 것. 흡사 수행과도 같이 수없이 반복하는 밑칠 작업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은 세상 밖으로 서서히 침윤한다. “밑칠은 그림에서 밑거름과 같아요. 바탕이 다져져야 색이 우러나오거든요.”
 
(좌)< Simultaneity 67-9 > 162x130cm Oil on Canvas 1967, < Simultaneity 77-53 > 162x130cm Oil on Canvas 1977 /서승원
(좌)< Simultaneity 67-9 > 162x130cm Oil on Canvas 1967, < Simultaneity 77-53 > 162x130cm Oil on Canvas 1977 /서승원
  
그는 1960년대 이른바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스타일의 사실주의나 비정형 추상회화운동 앵포르멜 등 국내 화단의 주류를 거스르며 독자적 경향을 모색했다. 1963년에는 뜻이 맞는 홍대 회화과 동기 최명영, 이승조 등과 뭉쳐 기하추상회화 그룹 ‘오리진’을 창설, 새로움을 갈구하는 청년작가답게 진취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그는 사각형, 삼각형, 색띠 등 순수조형을 바탕으로 한 기하추상에 몰두하는데, 특히 빨강, 노랑, 파랑 등 근작과는 사뭇 다른 강렬한 색감의 오방색을 사용했다.
 
동시성은 이때부터 시작됐고 이는 반세기간 연속돼 온 서승원의 유일무이한 연작으로 자리 잡았다. 짧지 않은 기간 계속 한자리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화하며 이지적이고 절제된 형태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분방한 형상으로 변모해갔다. 질서를 나타내던 엄격하고 엄정한 도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뭉뚱그려지며 눈부심에 빛이 번지듯 그 형태와 색은 희끄무레해졌다. 2000년대 들어 형태가 분산되고 해체되는 양상으로 변모한 이때를 두고 그는 스스로 ‘해체적 시기’라고 지칭한다.
 
(좌)< Simultaneity 17-366 >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7, < Simultaneity 18-309 > 90.9x116.7cm Acrylic on Canvas 2018 /서승원
(좌)< Simultaneity 17-366 >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7, < Simultaneity 18-309 > 90.9x116.7cm Acrylic on Canvas 2018 /서승원
이성적이고 차가운 조형을 일관해온 작가로서는 과감한 모험이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지금까지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의 전시 행사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2월 7일부터 4월 19일까지 한미 문화 상호 교류 기관인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개인전 ‘Suh Seung-Won : Simultaneity’을 연다. 1970년대부터 최신작에 이르는 동시성의 50년 변화 역사를 되짚는 자리로, 회화와 드로잉을 내건다. 서 화백이 직접 작품에 관해 설명하는 아티스트 토크(3월 14일) 등 연계 행사도 함께 마련될 예정. 이후 3월 말과 5월 초에는 홍콩에서 전시가 연달아 열린다.
 
 
아직 완성하지 않아 이젤 위에 놓인 작품을 보니 마치 노을 지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 같다. 저녁노을에 피어나는 뭉게구름마냥 화면을 따스하게 적신다. “나이가 드니까 자연스레 이렇게 변합디다. 날카롭거나 모난 부분 없이 온화하게 말이죠. 삶과 조화를 이루고 긍정하려는 내 마음이 드러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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