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시대, 능동적인 장녹수 의미 크죠"

입력 : 2018.04.09 09:44
'궁:장녹수전' 안무가 정혜진
'궁:장녹수전' 안무가 정혜진
안무가인 정혜진(59) 전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은 공연계에 기분 좋은 균열을 내왔다. 남성과 남성 중심의 서사 체계가 공고한 이 판에서 여성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작품에 참여해왔다.

'여자' 명성황후의 삶을 되짚어볼 수 있었던 '잃어버린 얼굴 1895', 연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웠고 아들 온조와는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서노'가 대표적이다.

이번에는 '조선의 악녀' '희대의 요부'로 통한 장녹수를 톺아본다. 정동극장이 지난 5일부터 오후 4시 새 상설공연으로 선보이고 있는 '궁:장녹수전'(연출 오경택)에 안무가로 참여했다.

장녹수와 연산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려진 문화 콘텐츠 속에서 장녹수는 섹슈얼리티에 초점이 맞춰졌다. '궁:장녹수전'은 장녹수가 조선 최고의 예인(藝人)이었다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둔다. 아울러 권력이 주는 술잔도 당당히 거부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정 안무가는 "여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싫다"면서 "명성황후, 소서노 같은 여자 역시 남자와 동등한 관계로 그리려 했고, 장녹수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데 저항하는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이 한창인 작금의 상황에서 '궁:장녹수전'은 적절한 울림을 안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녹수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커요. 기개가 있는 예술인으로서 그리고 싶었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상 연산군과 장녹수의 첫 만남은 예종의 둘째 아들이자 왕위에 즉위하지 못한 왕자 제안대군 저택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제안대군의 가노비였던 장녹수는 출중한 기예로 저택을 찾은 연산의 눈에 들어 궁에 입궐한다. '궁:장녹수전'은 장녹수의 기예를 강조하기 위해 그간 조명이 덜 된 제안대군을 수면 위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장녹수를 마냥 미화하는 우도 범하지 않는다. 노비였다, 기녀였다 '숙용(淑容) 장씨'가 된 장녹수는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연산군의 콤플렉스, 신하들의 과거 행적, 제안대군의 진심까지도 이용한다. 이런 모습들이 불과 75분이라는 러닝타임에 압축됐다.

극 초반 분위기는 발랄하다. 정 안무가는 장녹수를 사랑스런 말괄량이 캐릭터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변원림의 저서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등 관련 책, 연산군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다룬 논문까지 탐독하며 뼈대를 잡았고 작가 경민선이 살을 붙였다.

"연산을 폭주하게 만든 악녀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자신이 생겼어요. 또 다른 면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죠. 장면마다 '녹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했어요. 장녹수는 여전히 연구 대상이에요."

또한 '궁:장녹수전'은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와 중요 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를 이수한 정 안무가의 장점이 녹아들어간 작품이다. 한국 전통 무용극 장르로, 한국의 전통놀이와 기방문화가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잊힌 우리 전통 서민 놀이문화인 정월 대보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답교 놀이'를 비롯해 장구춤, 한량춤, 교방무 등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기방문화가 펼쳐진다.

장녹수가 입궐한 뒤에는 궁에서는 궁녀들이 꽃을 들고 추는 춤인 화려한 '가인전목단', 배를 타고 즐기는 연희 '선유락' 등도 등장한다.

"우리 춤 문화를 모두 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에요. 15개 춤이 마치 뮤지컬 넘버처럼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정 안무가는 지난달 중국, 일본 아시아는 물론 유럽 등 외국인 20여 명을 상대로 먼저 리허설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만족해했다. "어느 나라든 우리와 같은 이런 역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네 역사에 비춰봤을 때 어렵지 않았다고 했죠."

'궁:장녹수전'은 한국인에게도 귀한 경험이다. 이처럼 한국 무용이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 무용이 느리고 따분하다는 오해로, 안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궁:장녹수전'으로 조금이나마 달라졌으면 해요. 우리 춤의 '예쁜 맛'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오는 12월29일까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