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정경화 "난 여전히 지독하게 몸부림친다"

입력 : 2018.03.28 01:46

33번째 앨범 '아름다운 저녁' 발매, 음반 수 女바이올리니스트 중 둘째
"17세와 70세 때 연주 완전히 달라… 내 生에 쌓인 소리 꺼내 위로할 것"

"여자의 나이는 마케팅에 이용하면 안 된다고 항변했지만 올해 일흔이 된 건 사실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0)가 워너클래식에서 새 음반을 냈다. 프랑스 작곡가 포레, 프랑크, 드뷔시 작품들로 채운 '아름다운 저녁(Beau Soir)'이다. 7년째 파트너로 호흡 맞춰온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듀오로 작업했다.

2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정경화는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간담회장 입구엔 하얀 돌떡이 놓였다. 전날(26일) 70세 생일을 맞은 그를 위해 음반사가 준비한 성의였다.

27일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에서 70세 생일 케이크를 받고 웃음꽃이 핀 정경화. 그는 “아이폰으로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27일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에서 70세 생일 케이크를 받고 웃음꽃이 핀 정경화. 그는 “아이폰으로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통산 33번째 앨범이다. 클래식사(史)에서 음반을 33장 낸 연주자는 드물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선 아네조피 무터를 빼면 가장 많은 음반을 냈다. 여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잡아 한 번도 활을 놓지 않았던 '현(絃) 위의 인생 70년'이 거기에 담겼다.

정경화는 "33번이나 했으니 익숙하겠다 여기시겠지만, 이번에도 소감은 '이렇게 힘들다니 죽어도 못하겠다!'였다"며 "10대 중반 힘들지 않게 소화했던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며 특히 놀랐다. 나이 들수록 혀를 내두르게 된다"고 했다.

"60대 중반이던 프랑크가 아끼던 연주자 이자이에게 결혼 선물로 준 거예요.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두 젊은이가 세상을 논하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죠. 근데 제가 열일곱에 연주했던 것과 칠순을 바라보며 해석한 게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는 "사랑으로 있는 눈물은 다 흘려봤고, 기쁨도 넘칠 만큼 받아봤다"며 "그런 내가 연주한 음악이니 몸을 맡기고 끌려들어가 그 안에서 사랑도 하고 미움도 받아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엉킨 삶이 풀려요. 음악이 주는 위로예요."

일생을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온 정경화는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깔깔 웃었다. "2005년 왼손을 다쳐 모든 걸 중단했을 때 '힘든 때일수록 공부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떠올렸어요. 그래야 스스로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고요." 그는 모교인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가 후학을 가르쳤다. 바이올린을 앞에 놓고 머릿속으로 연주하는 연습도 계속했다.

"인생은 한 폭의 그림이에요. 남이 뭐라 하든 묵묵히 선 긋고 색칠하다 보면 자기 나름의 그림을 얻게 되죠." 그는 "옛날엔 음 하나만 놓쳐도 수치스러워 머릴 잡아 뜯었다"며 "지금은 몸이 달려 활이 빠지고 지저분한 소리도 난다. 하지만 매번 마지막 연주라 생각하면 내 생에 쌓인 소리를 청중한테 다 빼줄 수 있다"고 했다.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도쿄에 갔을 때 팬이라며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유키오 이즈미였다. 그는 아예 매니저가 돼 40년 넘게 일본 연주를 총괄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영국 서퍽의 포튼 홀에서 녹음을 시작하던 날,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잠시 말을 끊은 정경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와중에 겨우 녹음을 마쳤다"고 했다. "그러니 제발 내 이름 앞에 '레전드'란 단어는 붙이지 말아주세요. 레전드라면 연주가 쉬워져야 하는데, 난 여전히 힘들고 지독하게 몸부림쳐야만 한 음이라도 그을 수 있으니까요." 정경화는 이번 음반을 "내 오랜 친구 이즈미 상에게 바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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