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지휘자? 내겐 악보가 모두 물음표

입력 : 2017.11.30 01:35

日 나고야 콘서트홀에서 만난 빈 심포니 지휘자 필립 조르당
"음악은 총천연색 콘크리트 같아… 지휘할 때면 건축가 된 기분"

28일 오후 일본 나고야의 시민회관 콘서트홀. 오스트리아 빈 심포니를 이끈 지휘자 필립 조르당(43)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얼음 폭포를 두들기는 듯한 충격으로 시작했다. '따따따 따안~'이 울릴 때마다 격한 진동이 느껴졌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은 한결 섬세한 필치로 그려졌다. 현악기군의 세밀한 흐름을 통해 감정의 밑바닥까지 훑어내리는 지휘자의 의도가 도드라졌다. 아시아 관객에게 친숙한 베토벤과 브람스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40대 젊은 지휘자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평소 차분하기로 이름난 일본 청중이 이날은 "앙코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필립 조르당은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처럼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게 아들이나 딸이 생겨 지휘자가 되겠다고 하면 조용히 뜯어말리겠다”며 눈을 찡긋했다. /빈 심포니
필립 조르당은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처럼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게 아들이나 딸이 생겨 지휘자가 되겠다고 하면 조용히 뜯어말리겠다”며 눈을 찡긋했다. /빈 심포니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만난 그는 "두 곡 모두 C단조여서 한 무대에 올리면 멋진 드라마를 써낼 줄 알았다"고 했다. "빈 음악의 핵심인 베토벤과 브람스가 교향곡에서 쓴 C단조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인물의 삶을 표현하기에 딱 알맞죠." 조르당은 다음 달 5일 서울로 건너와 예술의전당에서 나고야와 같은 프로그램인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려준다.

하늘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받쳐 입고 일본식 밥상을 마주한 그는 기운이 넘쳤다. 일주일 전 빈을 떠나 도쿄·요코하마·후쿠오카·나고야를 거쳐 이날 저녁에도 후쿠이에서 연주해야 하는 "잔혹한 일정"이지만 "음악에 푹 빠져들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대개 타악기가 자리하는 오케스트라 맨 뒷줄에 더블베이스 주자들을 일렬횡대로 앉힌 것도 "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능숙한 젓가락질로 흰쌀밥 위에 명란을 콕 찍어 한입에 삼킨 그는 "악단의 중력이 작용하는 곳에 더블베이스가 서면 하모니의 중심을 이뤄 음악을 감싸 안는다"고 했다.

117년 역사의 빈 심포니는 세계 정상 교향악단인 빈 필하모닉에 가려 국내엔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 등 거장과 호흡을 맞추고,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초연한 전통의 강호다. 2014년 가을 스위스 출신 조르당이 키를 쥔 이후 악단은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파리 오페라 음악감독도 맡고 있는 조르당은 교향악단과 오페라, 양쪽을 모두 쓰는 드문 인재로 평가받는다.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3년간 다니엘 바렌보임을 보조하며 지휘계에 입문,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섰다.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 탁월하다. 지난 8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이끌었고, 내년 봄 뉴욕 메트에서 '반지' 사이클을 지휘한다. 2021년부턴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약할 예정이다.

그의 삶에서 아버지이자 지휘자인 아르맹 조르당을 빼놓을 수 없다. 아홉 살 때 지휘자가 되리라 결심했다는 그는 "한 번도 우주비행사나 소방관을 꿈꿔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요즘 젊은 지휘자들은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바로 경력이 시작되죠. 저는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지휘를 배웠어요. 악단과 리허설하면서 네댓 시간씩 피아노를 쳤고, 30분 동안 지휘하러 올라갔고, 오페레타를 지휘했죠." 그는 "음악은 총천연색 콘크리트 같다. 언어도, 실체도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며들어 그 틈을 단단히 메워주기 때문에 지휘를 하고 있으면 솜씨 좋은 건축가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 28일 오후 일본 나고야의 시민회관 콘서트홀 로비에서 필립 조르당이 지휘하는 빈 심포니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이 프로그램북과 음반을 고르고 있다. /김경은 기자
지난 28일 오후 일본 나고야의 시민회관 콘서트홀 로비에서 필립 조르당이 지휘하는 빈 심포니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이 프로그램북과 음반을 고르고 있다. /김경은 기자

"사람들은 말하죠. 유명한 아버지를 둬서 쉽게 경력을 쌓는다고.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 한동안 애증에 몸부림쳤죠." 그는 "스무 살부터 아버지 품을 벗어나 사지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10년간 죽도록 고생하고 서른이 돼서야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됐어요."

뛰어난 두 악단을 동시에 책임지고 있는 탓에 조르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무대에 선다. 그래도 "가끔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낀다"고 했다. "악보엔 수많은 지시가 있는데 그게 제 눈엔 물음표로 보여요. 아무도 그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으니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 매번 자문하죠. 할 수만 있다면, 베토벤을 만나 그 곡의 기원을 캐묻고 싶어요. 죽도록 고민하다 보면 언젠간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빈 심포니=12월 5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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