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한 권 읽는데 석 달…그래도 포기 안해"

입력 : 2017.09.28 11:29   |   수정 : 2017.09.29 10:51

독일 공연 가는 피아니스트 노영서씨
시력 20%만 남은 시각장애 2급

피아니스트 노영서(23·사진)씨의 악보는 A3 용지 크기다. 오선지와 음표가 큼지막하게 인쇄돼 있다. “연습하는 곡마다 따로 제본을 해서 일반 악보 오선지·음표의 3배 크기로 만들어요.” 노씨는 스타가르트병(유년기 황반변성)을 앓아 주변부 시력 20%만 남은 2급 시각 장애인. 다음 달 14일 시작되는 독일 투어 콘서트를 앞두고 하루 6시간씩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노영서씨/장련성 객원기자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노영서씨/장련성 객원기자


마틴루터대학, 페터스베르크 오스트라우성 등에서 네 차례 열릴 예정인 독일 공연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사됐다. 쇼팽 발라드 1번 독주 영상을 본 독일 할레극장 음악감독과 작곡가가 공연을 요청했다. “피아노와 하나 되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운데 정말 시각 장애인이 맞느냐”고 여러 차례 확인했다고 한다. 작곡가 마리아 레온체바는 이번 공연을 위해 피아노 독주곡 ‘사계(Four Seasons)’를 만들어 노씨에게 헌정했다. 노씨는 “내 연주 영상을 본 작곡가가 신선한 충격을 받고 시각 장애 연주자는 계절의 정서를 어떻게 표현할지 상상하면서 곡을 썼다고 한다”고 말했다.

유치원 때 피아노를 시작한 노씨는 한국일보콩쿠르, 한국쇼팽콩쿠르 주니어부 1위를 차지하며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열두 살 때 병이 찾아왔고 시력을 잃어갔다. 악보 한 권 음표만 읽는 데도 남들은 4~5일 걸리지만 노씨는 꼬박 석 달을 쏟아야 한다. 노씨는 “새로운 곡을 배우는 매순간이 인생 최대의 위기처럼 느껴졌다”며 “하지만 내 감정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인 피아노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기악과에 입학했다. 장애인 특별 전형이 아니라 일반 전형을 거쳤다.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경쟁해보고 싶었어요. 장애가 있다고 자꾸 스스로 편한 길을 택하면 실력이 늘지 않을 테니까요.” 지난 2월 졸업 학점은 4.3 만점에 4.1점. 졸업자 대표로 총장상도 받았다.

노씨는 “해외에서 정식 초청받아 떠나는 공연은 처음이라서 긴장된다”며 “음악적 표현을 고민하면서 재미있고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시각 장애 중·고생들에게 몇 차례 강연을 해본 적 있어요. ‘장애 때문에 안 될 거야’라며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학생이 많아 안타까웠죠. 제가 이번 공연을 잘 마치면 그 친구들도 용기와 희망을 갖지 않을까요.”
/김승현 기자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