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향기로 상도동 50번 적셨죠"

입력 : 2017.05.24 01:40

[국립중앙박물관장·문화재청장 지낸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

30년 인맥으로 명품 강사진 꾸려 마지막주 금요일마다 문화 강연
5년 동안 무료로 이웃들에 봉사 "문화재의 매력에 빠진 주민 많아"

이건무(70) 전 문화재청장은 퇴임 후 동네에서 더 친근한 이름이 됐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주민들은 그를 '우리 대표님'이라고 부른다. 퇴임 후 새로 판 명함은 '도광문화포럼 대표'.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저녁이면 상도동 양녕회관 강당에서 도광문화포럼이 개최하는 문화 강의가 열린다. 벌써 5년째. 수강료는 무료다. 관심 있는 동네 주민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문화 융성이란 게 거창한 게 아니더라고요. 지역 주민들과 좋은 강연 같이 듣고 답사도 다니니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주민들 관심도 높아지고 관계도 더 돈독해졌어요. 풀뿌리 문화 운동 같은 거죠."

이 대표는 30년 넘게 국립박물관에서 일한 국내 대표 고고학자다.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지낸 그는 2013년 3월 박물관 후배들과 함께 포럼을 발족했다. "처음엔 소규모 공부 모임을 만들려고 했다가 우리끼리 연구만 할 게 아니라 재능기부 형식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면 좀 더 의미 있겠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퇴임 후 풀뿌리 문화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문화로 호흡하는 게 진정한 문화 융성”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퇴임 후 풀뿌리 문화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문화로 호흡하는 게 진정한 문화 융성”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동네에 터 잡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종중에서 강당과 기자재를 무료로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도광(韜光·빛을 감춘다)'이란 이름도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인 지덕사의 재실 '도광재(韜光齋)'에서 따왔다. 이 대표는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은 셋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해 조선의 황금기인 세종 시대를 이끌었다. 세자의 자리를 내주었던 양녕대군의 겸양의 덕이 가득 배어있는 단어처럼,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 발표와 강연을 계속하면 많은 분이 찾게 될 것이란 뜻"이라고 했다.

강의는 어느덧 50회를 돌파했다. 고고학·미술사·역사·민속학·인류학 등 각 분야 쟁쟁한 석학들이 무료 강의로 뜻을 보탰다. 김권구 계명대 교수는 '불멸의 영혼-세계유산 고인돌',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은 '한국인의 죽음, 상장의례'를 주제로 맛깔나는 강연을 펼쳤다. 이원복 부산시립박물관장은 '우리 옛 그림의 천진과 익살'에 대해 들려줬다. 박물관 학예직 후배들도 자발적으로 강단에 올랐고, 이 대표도 여러 번 특강을 했다. 그는 "먼 데서 강의하러 와주신 분들께는 차비라도 드려야 하는데 기쁜 마음으로 '재능기부'를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라며 웃었다.

동네에 조금씩 소문이 퍼지면서 '개근생'도 늘었다. 은퇴한 기업인, 경찰, 은행원, 주부…. 적을 땐 40~50명, 많을 땐 100여 명이 서둘러 일 끝내고 강의 들으러 온다. 주부 이문숙씨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문화재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했고, 이정원 양녕대군 21대 봉사손은 "좋은 뜻에 동참하고 싶어 강당과 뒤풀이 장소까지 내드리고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주민들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현장 답사도 떠난다. 제주도 자연유산, 울산 반구대 암각화, 경주 유적지를 거쳐 지난 4월에는 전문가 설명을 들으며 목포 근대유산 거리를 돌아봤다. 그는 "논어에 익자삼우(益者三友)라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이로운 친구가 세 부류 있는데 첫째가 정직한 사람, 둘째가 친구 간에 도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세 번째가 바로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며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으며 저도 매주 공부하고 아이디어도 얻는다"고 했다.

26일에는 권영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한국인의 미의식'을 주제로 51회 강연을 한다. 이 대표는 "이런 문화 운동이 다른 지역으로도 널리 전파되면 좋겠다"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끌어주고 향유 기회를 넓히는 게 바로 문화를 살리는 길 아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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