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관객을 위한 광대, 쉬어가시길"

입력 : 2017.01.23 00:35

[국립극단 '조씨고아' 주연 하성광]
지난해 중국 공연서 기립박수… 국내 무대도 객석 점유율 95%

하성광은 “치달아 오르는 감정을 삭이느라 배역에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아비의 탄식은 메아리가 돼 관객의 폐부(肺腑)를 찌른다. 간신 도안고의 계략에 멸문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씨앗 조씨고아(趙氏孤兒)를 살리려 자기 자식을 내줄 때 그 눈빛은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까짓 게 무어라고!" 조씨고아를 품 안에 들고 내뱉는 필부(匹夫) 정영의 절규에 극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에서 150분 내내 긴장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관객을 웃고 울리던 정영의 아우라는 어느덧 인간 하성광(47)으로 변해 있었다. 부성애와 의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영을 연기하기 위해 밑바닥부터 혼(魂)을 끌어올려 토해내던 것과는 달리 넉넉한 반달 웃음이 푸근했다.

"살다 보면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하는 것보다 떠밀려서 선택하게 되는 게 많아지는 듯싶어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고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연극은 13세기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한국적 해학과 정서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2015년 국내 초연에 이어 지난해 베이징 국가화극원 무대에서 기립 박수를 끌어내며 화제가 됐다. 지난 18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오른 뒤 객석 점유율 95%, 다음 달 12일 마지막 공연까지 예매율이 80% 가까이 된다.

극 중 정영은 아들과 맞바꾼 조씨고아가 성장할 때까지 20년을 기다린다. 그간의 세월은 2막을 시작하면서 정영이 아들 무덤 앞에서 얼굴에 흰 칠을 하는 장면으로 압축된다. 흰 칠은 세월을 연상시키지만 전사(戰士)가 전열을 정비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20여년 전 단원 모집 포스터에 끌려 대학로 극단에서 내공을 다져온 배우 하성광의 인생을 반추하는 듯하다.

극 중 정영이 조씨고아를 안고 절규하는 장면. /국립극단
극 중 정영이 조씨고아를 안고 절규하는 장면. /국립극단

"믿어주면 믿음직하게 되잖아요. 초연 때 함께했다 고인(故人)이 되신 임홍식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께서 '좋더라'며 툭 던지신 한마디가 그렇게 힘이 되는 거예요. 근데 또 이 정도면 됐나 싶다가도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런 삶의 반복이었죠."

같이 극단 생활하다 TV나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는 동료를 먼발치서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질투도 많이 했죠. 마흔 넘어서도 그랬으니 그 시간이 꽤 길었어요. 좀스럽죠. 하하. 질투하는 에너지를 연기하는 에너지로 바꾸니 제가 가진 역량이 작지만 그때야 보였달까…."

복수는 성공하지만 후련하지 않다. 허무하기까지 하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극 마지막 퍼지는 묵직한 목소리를 따라 처연한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비상한다.

그는 '배우'라는 말을 애써 사양했다. "어느 선생님이 '배우는 하늘이 내리는 거'라 하시더라고요.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고 잠시 쉬어 가게 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광대가 되고 싶어요." 눈앞에서 광대가 웃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수만 마리 나비가 빛을 내며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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