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SEEING : 비워진 모습

입력 : 2025.04.30 16:26

 
참 여 작 가 이용덕 Lee Yong Deok
기        간 2025. 5. 7 Wed — 6. 7 Sat (32일 간)
장        소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21길 30
                화 ― 토, 오전10시 ― 오후6시
                일 ― 월 및 공휴일 휴관
주        최 ART CHOSUN, TV CHOSUN
기        획 ACS, Kate Lim
입   장  료 무료
문        의 02 736 7833

 
이용덕의 역상조각: 음각(陰刻)의 생각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얇은 직육면체 모양이다. 두께가 보통 3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이 직육면체의 정면에 움푹 파인 구덩이 같은  게 있다. 처음에는 무언지 모르는 형태지만 곧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작품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쪽저쪽으로 움직여보면, 음각(陰刻)으로 파인 공간에서 사진이 포착한 듯한 이미지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양각으로 보이는 볼록한 환영이 직사각형 표면에 부유하듯 피어 오른다. 
 
18년전쯤 처음으로 역상조각을 보았을 때 나는 마치 무지개를 보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린애같이 –  ‘쿨한’ 태도로 작품에 접근하는 전문가적인 체면을 나도 모르게 잃어 버리고 -  여러번을 반복해서 음각에서 양각으로의 변화를 따라가 보고, 또 양각 이미지로부터 음각 구덩이로 역추적을 해 봤다. 역상조각은 관객의 호기심과 관심을 먹고 잠에서 깨어나는 미술이다. 뒷걸음치거나 앞으로 다가갈 때, 살짝 포착된 이미지의 단편이 점차로 완성되거나, 보였던 이미지가 무너지며 이지러지는 재미있는 행동을 한다. 게다가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짜같이 느껴지는 볼록한 이미지는 정교하게 핵심만 남겨서 기억에 저장하고 싶은 사진의 이미지와 믿을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양각의 이미지에서 풍겨나오는 유령적인 아우라에 살짝 놀라기도 한다. 마치 음각 공간에 있던 어떤 존재가 그 공간을 비우고 잠깐 바깥으로 옮겨온 것 같다.  ‘무의미’가 ‘의미’로, ‘아니다’가 ‘~이다’로 ‘없다’가 ‘있다’로 둔갑하는 탄생과 소멸 그리고 부활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다.
 
역상조각의 독특한 형식은 미술작품에 대해 관객이 시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이용덕이 예민하게 관찰한 결과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두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젊은 시절, 그는 당시 유행하던 정치사회적 함의를 찾거나 관념적 심오함을 내세우는 미술 작업을 싫어했다. 작품과 고정된 답을 일대일로 짝짓기를 하는 듯 했고, 그런  정답 해설이 끝나면 작품의 가치가 폐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에 의미를 투여하려는 집착을 버리고, 대상을 보는 경험에 순수하게 집중할 때 감각이 증폭되고 그 잠재력이 확장되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용덕은 관객의 감각과 즉각적인 연결에 초점을 두는 여러 실험에 몰두했다. 특히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그는 “foreigner – reflex(1996)”, “kl.k.7d.24.10.1920Berlin(1995)”, “mirroring(1995)”, “shadows of Nina(1993)”등의 작품들을 만들면서 누군가가  있었던 순간적 흔적, 사진에 찍힌 이미지에 같이 묻혀있는 시간의 현재 실재로의 회복, 사실이라고 추정하는 인식의 정체를 탐구해 봤다.
 
이용덕은 베를린에서 돌아온 뒤,  그간에 축적된 실험적 작업과 생각을 토대로 사람의 정지된 이미지를 음각으로 만드는 역상조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점토로 성형(modelling)하고 거기에 석고 몰딩(moulding)을 만든 뒤, 몰딩에서 캐스팅(casting)해 최종 조각품을 만드는 통상적인 제작 방식을 뒤집었다. 몰딩의 음각이 점토 성형이 찍힌 흔적인데, 사람들이 점토의 양각을 떠올리면서 양각인 듯이 인식하는데 착안했다. 그래서 아예 마지막 캐스팅 과정을 없애고 몰딩을 최종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용덕은 실제 물체가 양각인지 음각인지와 관계 없이 양각으로 인식하게 되는 광학의 원리에 주목했다. 그는 “면적을 가진 모든 입방체는 오직 빛을 통해서만 그 형태를 드러낸다. 빛이 물체의 표면과 부딪히면서 표면의 굴곡이 음영을 만들어내고, 그 음영의 효과에 따라 우리 눈이 입체를 지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빛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서 모든 곳을 같은 밝기로 비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휘도(輝度, luminance), 즉 밝기의 차이에 의해서 입방체를 인식한다.  우리 눈은 입방체를 직접 보지 못한다. 오로지 빛이 입방체라는 것을 우리 눈에 알려줄 뿐이다. 빛이 우리 눈과 입체를 연결해주는 중매쟁인 것이다. 
 
보통 조각가들은 이 광학 원리를 양각 조각에 활용해왔다. 반면 이용덕은 똑같은 원리를 음각 조각으로 구현해냈다. 자신만의 기법으로 음각의 웅덩이 안에 빛을 깊숙히 끌어와 음영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구태여 작가가 캐스팅을 만들어 내보이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몰딩을 보고 자신의 눈으로 캐스팅을 해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관객이 캐스팅을 하기 때문에 작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위치를 바꿔감에 따라 빛의 각도가 달라지면서 다양한 캐스팅이 나온다. 양각이 소멸하고 음각으로 푹 커지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음각 공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내놓아서 크게 유명하다. 이용덕의 음각 조각은 화이트리드의 방식과 크게 다르다. 훨씬 복합적인 사고가 투영되어 있다. 화이트리드는 음각 공간을 자신이 직접 양각으로 만들어서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녀의 대표작 “House(1993년)”는 곧 철거될 집의 내부 공간에 시멘트를 부어서 캐스팅한 작품이다. 즉 음각 공간을 물질로 채워 넣어 양각의 입체를 직접 만든 것이다. 집같이 보이지만 집이 아니고, 텅 빈 공간을 채운 콘크리트 덩어리다. “House”의 양각 표면에는 문 손잡이, 창문틀, 벽지, 처마 장식 등의 흔적이 음각으로 찍혀 있다. 집의 내부에 있던 것들을 음각으로 찍어 흔적을 남겼지만, 전체 작품은 통상적인 양각 조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집이 반대로 뒤집히기는 했지만 콘크리트 물질로 만든 양과 부피와 무게를 갖는 보통의 양각 작품이다.  
 
반면 이용덕은 캐스팅 작업을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관객에 맡겼다. 관객이 양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조를 음각의 몰드 안에 넣어줬을 뿐이다. 따라서  화이트리드가 “음각은 이런 모양이야”라고 관객에 직접 내보인 것과 달리, 이용덕은 관객이 어떻게 인식할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한 뒤 “음각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음각의 몰드 안에서 피어날 수 있는 양각을 관객에게 살짝 비춰주는 선에 멈춘다. 화이트리드의 꽉 채워진 물질로 만들어낸 양각과 달리 이용덕의 양각은 시각의 작용으로 채워낸 일루젼(Illusion)이다.
 
일루젼은 영구적이지도 않고 틀릴 수도 있다. 관객의 위치와 시선에 따라 음각이 영롱한 양각으로 됐다가 또 허물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일루젼은 조건과 문맥에 따라 변화한다. 그렇다고 가짜는 아니다. 제한된 상황에서의 시각적 실재(實在)다. 눈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 눈에 비치는 일루젼을 보는 것이 실재를 보는 것이다. 시각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메커니즘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눈은 어리석음과 총명함을 오가며 일루젼을 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충성하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세계와 교전한다. 
 
뇌과학자 세미르 제키(Semir Zeki)는 일루젼에 관해 흥미있는 연구를 했다. 우리의 시각뇌가 항상 복수의 해석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어서 애매모호함(ambiguity)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애매모호함’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을 내포하지만, 제키는 시각뇌에게 애매모호함은 서로 다른, 그렇지만 저마다 합당한 판단이나 해석이 항상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볼 때 제한된 맥락에서 실재라고 보이는 일루젼은 우리의 뇌에 투영되는 복수의 해석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양각을 양각으로 보는 것도 맞고 음각을 양각으로 보는 것도 맞게 된다. 
 
제키는 예술가들이 시각뇌가 복수의 해석을 하는 능력을 창작에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애매모호함을 작품에 멋있게 구현하면 작품을 보면 우리의 시각뇌는 여러 다양한 해석을 투영하면서 분주하고 즐거워진다. 제키는 그래서 한 가지로 고정된 해석만 던지는 미술품보다 애매모호하게 보이는 작품이 보편적으로 더 폭넓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고 얘기한다.  제키의 이론에 따르면 관객이 역상조각에 끌리는 이유는 음각과 양각이 애매모호하게 오가면서 관객의 뇌를 바쁘게 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머리 속에서 “양각적 이미지가 내 눈이 만들어낸 환영이구나, 그렇다면 음각의 흔적이 진짜이고 저 양각은 가짜일까? 어떻게 저렇게 선명한 양각 이미지가 음각에서 비롯될 수 있을까?” 등등의 질문을 하며 뇌에게 답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관객에게 객관적 의미를 결정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각의 밑그림과 양각의 일루젼 사이를 잇는 애매모호함을 자유롭게 탐험해 보라고 보여줄 뿐이다.
 
근대미술사에서는 이러한 시각뇌의 애매모호함이 갖는 유연함을 참지 못하고 일루젼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크게 퍼져갔고 이것이 작가들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방향의 첨단으로 나간 조각가도 일루젼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 프레드 샌드백(Fred Sandback)은 전통 조각이 갖고 있는 질량감을 최대한 소거하고 실끈으로만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얇은 아크릴 실을 벽에서 벽으로, 천장에서 바닥으로 연결해서 매달았다. 공간에 드로잉을 한 것이다. 전통 조각이 해체된 최대치의 경지를 실현해 본 것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실끈과 실끈 사이에 유리창이 있는 것 같은 일루젼을 보고, 손을 내밀어 그 일루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고 한다. 조각의 양각적 질량을 최대한 축약해서 질량이 주는 요철과 굴곡을 통해 일루젼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제거했어도, 관객의 눈은 또 다른 종류의 일루젼을 경험하는 것이다. 샌드백은 그래서 “일루젼은 사실만큼 리얼하고, 사실은 일루젼만큼 순간적이고 덧없다.”라고 말했다. 
 
일루젼은 참으로 이상하다. 아무리 소거해 나가려고 해도 우리의 눈에는 끈질기게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의 실재이다. 이용덕은 음각 조각을 통해 이 실재를 관객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관객은 음각이 품은 생각들을 읽어 보며, 자신의 인식 과정을  비춰주는 예술의 빛을 느낀다.
 

playing 041783, 2024, Mixed media, 119x190x12cm
 

playing 251381, 2025, Mixed media, 103x185x12cm
 

reading 250981, 2025, Mixed media, 180x103x18cm
 

running 081084, 2024, Mixed media, 110x165x15cm
 

sitting 250881, 2025, Mixed media, 168x118x12cm
 

standing 082484, 2024, Mixed media, 110x205x15cm
 

writting 041583, 2004, Mixed media, 127x90x1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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